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생각하는 만큼의 세계를 산다

생각하는 만큼의 세계를 산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존재다.  생각하는 만큼의 세계를 산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변화하는 대로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고 생각하는 대로 변화하는 존재란 말이다. 환경이 달라져서 사람이 달라질 줄 알지만 아무리 환경이 달라져도 달라질 수 없는 사람은 못 달라진다. 촌사람은 항상 촌사람이요. 덜된 사람은 항상 덜된 사람이요. 욕심쟁이는 항상 욕심쟁이요. 불평하는 사람은 끝없이 불평한다. 그건 불평하다가 죽을 사람이지 그 사람의 불평을 끌 수 있는 환경은 없다.  -곽선희 목사의‘본분을 지키는 자의 복’에서- 모든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내 복의 근본입니다. 하나님과의 정직한 관계가 바로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물질이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태평성대가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여호와가 나의 복이며. 그로부터 복이 온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방향대로 변화가 옵니다. 그 변화된 대로 내 존재는 결정되는 것입니다.

The Lord is My Strength

SUNDAY SCRIPTURE:     The Lord is My Strength via  (in)courage         Praise be to the Lord, for He has heard my cry for mercy. The Lord is my strength and my shield; my heart trusts in Him, and He helps me. My heart leaps for joy, and with my song I praise Him. The Lord is the strength of His people. Psalm 28:6-9

The Internet is Not the Boss of You

BLOG POST:     The Internet is Not the Boss of You via  (in)courage         by  Lisa-Jo Baker           We spent six days in northern Michigan lake country with no Internet, cell or data connection. Gets a girl thinking real hard about this online space we all spend so much time in. And wondering how to carve out quiet, safe spaces for the soul to remember it is beloved, pursued, cherished and called in the midst of the chaos we wade through every day. The sky was so big and the water so wide it made me feel small in all the right ways. I am so small in that context. And it’s a relief. We were not built for big. We were built to reflect the glory of the God who is big. And who is not afraid to speak to us in a still, small voice; a gentle whisper.

자족하는 감사

자족하는 감사 어떤 사람이 프랑크 총독에게 행복해지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총독은 빙그레 웃으면서 “나는 행복해지는 비결은 모르지만 불행해지는 비결은 알고 있지요.” 하면서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저 사람처럼 나도 행복했으면’ 하고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나이를 먹은 뒤에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때처럼만 행복 할 수 있다면...’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사람이란 그 속에 불만이나 원망이 있는 한은 행복할 수 없다는 겁니다.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현대인들은 누구나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해도 어쩔 수 없는  병적증세를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 질환의 공통적이고 근본적인 증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불만과 원망입니다. 늘 이것들이 우리를 병적으로 살게 하고 있습니다. 그 속내를 잘 들여다보면 내가 가진 것이 없어서 불만이고 불평인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잘 살지 못해서 생기는 불만이고 불평이니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불만을 채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의 행복이란 소유에 있지 않고 깨달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사람이 육체적 본능이나 물질적 소유욕을 채운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식욕을 채우고, 명예욕과 권위욕을 채운다고 해서 기쁨이 오고 만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만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순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배부르지만 배가 고파지면 곧 불평하게 될 것이고, 누리던 명예나 권위를 빼앗기고 나면 곧 불행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 순간적인 것에 매여 행복을 갈망한다면 금방 허무...

겸손 /은별

주님의 은혜에 빚지고 주님의 사랑에 빚진 사람은 겸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빛 앞에 낱낱이 자신이 숨김없이 드러나게 되면 우리는 입을 막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입니다. 겸손의 주체는 주님이시지요. 겸손은 이론과 지식이 아닌, 주님의 발아래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겸손의 영은 주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불완전함 속에서 배웁니다. 모든 것이 나와 같지 않습니다. 성격도 믿음도 지식도 열정도 천차만별, 각자의 소리로 시끄럽고 분요하며 요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께만 우리의 시선이 고정될 때 모든 것이 평정이 됩니다. 주님만이 다양함의 하나입니다. 홀로 완전하신 주님은 이 불완전함 속에서 두루 운행하십니다. 교만한 자 깨뜨려 겸손케 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에 은혜를 더해주시지요. 철저히 가루처럼 부수어진 자들, 낮고 낮은 심령에 겸손의 영을 부으시며 불완전함 속에서 우릴 놓지 않고 결국 하나하나 주의 뜻을 이루시는 집요한 사랑에 감동하며 전율합니다. 성령, 이 은혜의 시대에 주님의 아름다운 몸이 건축될 때에 불과 물을 통과한 겸손은 산돌과 산돌사이를 연결하는 참 귀한 덕목입니다. 때때로 불어오는 부당한 물결과 까닭 없이 격동하는 파도가 올지라도 조용히 주를 바라며 오히려 말씀이신 그분께 영혼의 닻을 더 깊이 내리십시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고요히 마음속으로 축복하고 기도하며 주께 하듯 온유함으로 겸손의 띠를 두르고 사랑으로 종노릇 하십시오. 이 축복받는 자리를 빗겨가지 말고 주의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십시오 겸손은 어느 한 사람에게 한정되지 않고 더 널리 번져가야 합니다. 그러하면 한 알의 밀이 땅 속에서 죽어져 많은 밀알을 맺듯이 나의 눈물로 겸손이 심겨지면 많은 겸손이 열려 주님께 기쁨이요 천국이 넓혀지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은별             ...

성품(性品)의 불

  성품(性品)의 불 일반인들이 기독교인들을 가까이 할 때 따뜻함을 느껴야 합니다. 불이 뜨거운 이유는 열이 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불의 종교이기 때문에 열이 나야 하고,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편해지고 몸이 녹아야 정상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면 성품이 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짜 불은 마치 모니터 속에 있는 그림처럼 가까이 가도 아무런 열기를 느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찬바람이 쌩쌩 붑니다. 기독교인들 하면 자기 주장만 강하고, 말도 안 통하고, 비판, 분열, 완고함, 정죄함의 이미지를 준다면 그것은 확실히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충만 하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해서 목이 쉬어 걸걸해지거나, 태도와 표정이 근엄해지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눈빛이나, 자신 있게 말을 하고 전도를 하는 태도'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물론 그것도 성령충만 하면 나타나는 한 모습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을 받은 사람의  진짜 큰 변화는 성품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게 바뀝니다. 아무리 개성이 강한 사람이라도 부드럽고 너그러운 사람이 됩니다. 우선 말이 유연해집니다. 심한 말로 상처를 주던 사람의 말이 위로하고 염려하는 말로 바뀝니다. 우리는 자꾸 무엇을 하려고 하고,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자꾸 하는 것보다 자꾸 무엇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모세도 자꾸 무엇을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광야로 보내 40년 동안 무엇이 되게 하셨습니다. 지나가는 불은 진짜가 아니고 번개처럼 1초도 안되어 사라집니다. 기독교는 성품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온유와 겸손'의 삶으로 손수 그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믿고 성품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리 내가 뜨거운 신앙고백을 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다리

살아 있는 다리 인도의 체라푼지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땅에 있는 많은 강과 개울을 건너는 독특한 방법을 개발해냈습니다. 그들은 고무나무의 뿌리에서 다리가 자라나게 합니다. 이 “살아있는 다리”는 다 자라기까지 10년에서 15년이 걸리지만, 일단 완성된 다음에는 매우 안정적으로 몇 백 년 동안을 지탱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을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렘 17:8) 있는 것에 비유합니다. 그 나무는 뿌리에 영양분이 잘 공급되기 때문에 찌는 듯한 더위에도 살아남고, 가뭄에도 여전히 열매를 맺습니다. 굳게 뿌리내린 나무와도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안정감과 활력을 유지합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불안정한 느낌 속에 살아갑니다. 성경은 그들을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혼자 서있는 사막의 떨기나무에 비유합니다(6절).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들의 영적 생활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뿌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골 2:7). 다른 사람들을 주님에게로 이끄는 다리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면,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 17:7) 라는 진리를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구주 예수 떠나가면죄 중에 빠지리. 아무리 심한 역경도 하나님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을 쓰러뜨릴 수 없다. /오늘의 양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