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불습유(道不拾遺)
옛날 옛적 경상북도 상주 땅에 서 씨성을 가진 양반 하나가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양반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집안은 오래전에 몰락하여 그저 작은 땅뙈기에 농사를 지으며 입에 겨우 풀칠을 하고 사는 정도였죠.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서 선달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시대의 선달은 과거 시험에 급제는 했으나 아직 벼슬을 받지 못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었는데요.
서 선비는 학문이 얕아 과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상 그는 선달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심성이 워낙 착하고 성실한 데다가 언제나 자기 사정은 뒷전으로 하고 발 벗고 나서서 다른 사람을 돕는 탓에 마을 사람들이 그를 높여 불러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극심한 흉년이 들어 서선 다른 농사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종자를 살 돈마저 떨어져 발을 동동 굴렀지요.
생각도 못한 그는 돈을 빌리기 위해 멀리 부산에 사는 육촌 동생을 찾아갔습니다.
상주에서 부산까지는 500리가 넘는 먼 길이었습니다.
산 넘고 넘어 6촌 동생을 찾아간 서 선달은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했지요.
"내 올해 농사가 끝나고 나면 꼭 갚겠네. 100냥만 빌려주시게."
"형님도 아시다시피~ 저희도 흉년이 들어서 사정이 녹록지 않습니다."
동생은 난색을 표했습니다.
올해는 꼭 풍작을 이루어 자네 돈을 200냥으로 불려주겠네.
"허허, 형님도 참!"
동생은 서 선달의 어설픈 장담에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친척은 서 선달에게 백냥을 내어주었고, 서 선달은 연거푸 사례를 하며 집으로 향했지요.
서 선달은 친척에게 받은 돈 백냥 꾸러미를 전대해 넣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농사 지을 밑천이 생겼으니 마음은 한결 가벼웠고, 발걸음도 날아갈 듯했지요.
그런데 콧노래를 부르며 산 마루를 넘던 도중 서선 다른 허리 춤이 허전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급히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았지만 전대는 사라지고 온데간데 없었지요.
서 선달이 집으로 급히 돌아가느라 서둘러 고개를 넘던 도중 자기도 모르게 전대를 흘려버린 것이 분명했지요.
하지만 서 선달은 언제 어디서 전대를 흘렸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쿠야...! 내 돈..!"
전 재산을 잃어버린 서 선달은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얼굴이 흑빛이 된 그는 왔던 길을 돌아서 뛰어가기 시작했죠.
허겁 지겁 삼십리 먼 길을 길바닥만 바라보며 뛰어가던 서 산달은 높은 고갯마루를 오르다가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때리며 한탄했지.
"이 멍청한 놈!
그 귀한 돈 사라진 줄도 모르고,
이 바보 같은 놈!"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흘러내린 땀이 눈 속으로 들어가 눈을 뜰 수도 없었습니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나 이젠 망했네. 그려!!"
바로 그때 누군가가 서 선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죠.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
고개를 들어보니 도포를 입은 웬 중노인 하나가 뒷짐을 진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길을 서둘러 가다가 그만 전대....
"전대에는 얼마가 들어 있었나?"
"친척에게 빌린 백냥이 들어 있었지요."
서 선달의 눈에서는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이 연신 흘러내렸습니다.
그러자 중노인은 뒷짐 졌던 손에 들고 있던 서 선달의 전대를 그의 눈앞에 내밀었죠.
"혹시 이 전대가 자네 것이 아닌가?"
서 선달은 전대를 보니 정말로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어찌 어르신이 이걸 가지고 계십니까?"
"내가 2 식경쯤 전
이 고개를 넘다가 전대를 하나 주었네.
전대를 열어보니 100냥이나 되는 큰 돈이 들어 있었어.
목숨같이 귀한 돈을 잃어버린 사람 속이 얼마나 탈까?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가던 길을 멈추고 여기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네."
그 노인은 누군가가 흘린 돈을 찾아주기 위해 한 시간이나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
"고맙습니다. 어르신 어르신께서 제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서 선달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노인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제가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요?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서 선달은 진심으로 사례를 하고 싶었지만, 노인은 손을 훼훼 저을 뿐이었습니다.
"은혜랄 게 뭐가 있겠나 나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 걸."
말을 마친 노인은 지체 없이 돌아서서 산 아래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람이었을까? 산신령이었을까?
아니야. 분명 사람은 아니었을 거야.
사람이었다면 그 큰 돈을 찾아줬을 리가 없지. 암!"
길을 걷는 내내 서 선달의 머릿속에는 산에서 만난 노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돈을 찾고 다시 길을 걸어 서 선달은 안동의 어느 작은 나루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웬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지요.
"사람 살려주세요!!"
놀라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가 보니 그곳엔 위급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 여인이 발을 헛디뎠는지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었죠.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 하고 있지만 물살이 강해 도저히 그러지 못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죠.
"아이고~ 어떻게 좀 해봐요? 저러다 저 여자 죽겠어요~!"
그러자 누군가가 답했습니다.
"이 강은 물살이 요상해서 섣불리 뛰어들었다가는 같이 죽을지도 몰라."
그렇게 구경꾼들은 많아도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 선달은 자기라도 당장 뛰어들어 그녀를 구하고 싶었지만 평생을 산촌에서만 산 터라 헤엄을 전혀 칠 줄 몰랐죠.
이에 어찌해야 하나 발만 동동 구르는데 문득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이에 그는 자신의 돈 꾸러미를 높이 치켜 들며 소리쳤지요.
"누구든~ 저 여인을 구해주는 사람에게 이 돈 백냥을 주겠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백량! 정말이요?"
서 선달은 돈꾸러미를 더욱 높이 들며 더 큰 소리를 냈습니다.
"정말이오. 저 여인을 구해온다면 여기 내 손에 든 백냥을 바로 주겠소."
그러자 어느 장정 하나가 강물에 첨벙 뛰어들어 여인을 강가로 구해냈지요.
"서 선달은 약속한 대로 그 장정에게 자신의 전재산인 백냥을 내주었습니다."
그러자 죽다가 살아난 여인이 서 선달에게 말했죠.
"정말 고맙습니다. 선비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쯤 물귀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와 함께 저희 집으로 가시죠.
아버님께 말씀드려 이 은혜를 꼭 갖고 싶습니다."
"아니요. 나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오."
서 선달은 고개를 저으며 가던 길을 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문득 무릎을 꿇으며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지요.
"아니 되옵니다. 이렇게 그냥 가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인의 간청에 서 선달은 망설여졌습니다.
순간의 의협심에 전 재산을 걸고 여인을 살리기는 했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한편으론 막막하기도 했기 때문이지요.
"알겠소이다. 내 잠시만 짬을 내지요."
그렇게 서 선달은 결국 여인을 따라 그녀의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안동 읍내에 있는 여인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소녀가 사는 곳이지요."
집을 본 서 선달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인의 집이 글쎄 99 칸이나 되는 커다란 저택이었으니까요.
알고 보니 여인은 안동에서도 가장 돈이 많다는 권 부잣집 외동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리 고래등 같은 저택은 난생 처음 보는구려"
서 선달은 내심 크게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헛기침을 여러 번 했습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여인의 부친 권 부자가 버선발로 달려나왔습니다.
권 부자는 서 선달의 두 손을 덥석 잡고 말했습니다.
"귀인께서 내 딸의 목숨을 구해주셨다 들었습니다. 참으로 고맙소이다."
서 선달은 권 부자의 요란한 환대에 쑥스러워 고개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르신!"
"허허~ 지나친 겸양의 말씀이시오.
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권 부자는 다시 서 선달의 손을 강하게 끌었습니다.
바로 그때 권 부자의 얼굴을 본 서 선달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죠.
"아니 어르신은....."
"아니 자네가......"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을까요?
놀랍게도 여인의 부친 권 부자는 다름 아닌 서 선달의 돈을 찾아주었던 바로 그 노인이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우리 오늘 점심 나절에 산에서 만나지 않았는가?"
권 부자는 감탄하며 말을 이었습니다.
"그 귀한 돈으로 내 여식의 목숨을 구해주었단 말인가? 자네는 정말 의인이구만..."
"아닙니다. 댁의 따님은 어르신께서 살려내신 겁니다.
제가 산에서 돈을 잃어버렸다면 무슨 수로 따님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서 선달은 여인을 구한 공을 오히려 권 부자에게 돌렸습니다.
그러자 권 부자는 서 선달에게 더욱 감동했지요.
"내 귀한 외동딸을 살려주신 은혜,
내 백골이 되어도 잊지 않겠네."
잠시 후 권 부자는 보답이라며 돈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그 안에는 무려 천 냥이나 되는 큰 돈이 들어 있었죠.
하지만 서 선달은 낮에 권 부자가 그랬듯 손사래를 칠 뿐이었습니다.
"천냥이라니요? 저는 백냥이면 족합니다."
그러고는 그중 100량만을 가져가는 것이었죠.
"그 사람도 참! 사람을 섭섭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 그랴!"
"갈 길이 멀고 할 일이 많아 저는 그만 일어나야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서 선달은 권 부자에게 절하고 돌아서서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방문 앞에는 어느새 곱게 단장한 여인이 두 팔을 벌려 서 선달을 막아서고 있었습니다.
"이렇게는 못 보내드립니다."
서 선달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며 권 부자를 돌아보았습니다.
"돈이 그리 싫으시다면 내 여식은 어떤가? 내 마침 자네같이 의로운 이로 신랑감으로 찾고 있던 중일세"
서 선달은 말문이 막혀 뭐라 말도 못하고 권 부자와 여인을 번갈아 보었습니다.
그러자 권 부자는 껄껄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길 수 있지만, 내 여식은 못 이기는구만 그래. 하하하"
그렇게 서 선달은 만석지기 권 부자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큰 부자의 사위가 되었음에도 그는 변함없이 성실히 농사를 지어 지난날 친척과 약속한 대로 빌린 돈의 갑절인 200냥을 갚았다고 하죠.
이후 서 선달의 미담은 조정에까지 알려졌고, 임금님은 그런 선한 마음씨를 가진 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면서 서 선달에게 안동 현감 자리를 내려주었습니다.
그렇게 서 선달은 자신이 베푼 선행으로 인해 마침내 가짜 선달을 벗어나 진짜 벼슬 길에 오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현재까지도 경상북도 안동 지방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의 고전 한비자에는
'도불습유(道不拾遺)'라는 말이 있습니다.
"길에 떨어진 물건은 주어가지 않는다"라는 말로, 다른 사람의 물건에 탐심을 가지지 말고, 물건 잃어버린 사람의 심정을 생각해 보라는 속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건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어진다면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죠.
마치 권 부자가 서 선달의 돈 꾸러미를 찾아주어 그 덕에 서 선달이 그의 딸을 구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요즘에도 잃어버린 큰돈이 주인을 찾아 되돌려주었다는 미담이 간간이 들려오곤 합니다.
여전히 타인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살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러니 우리도 함께 '도불습유(道不拾遺)'의 마음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더욱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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