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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심겨진 그곳에 꽃 피게 하소서.”

[감동] “심겨진 그곳에 꽃 피게 하소서.” #풍경1 .. 1959년 12월 12일 밤 8시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6년 뒤였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화물선은 17일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그 화물선에 스물한 살의 미국인 여성 트루디가 타고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출발할 때, 건너편 산에 있던 고급 주택들에서 반짝이던 불빛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한국에 처음 온 트루디의 눈에는 부산의 밤 풍경도 그랬습니다. 화물선에서 내다본 산에는 집집 마다 쏟아내는 불빛들로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트루디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부산은 샌프란시스코만큼 아름다운 도시구나.” 이튿날 날이 밝자 트루디는 갑판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눈에 들어온 광경은 딴판이었습니다. 지난밤에 보았던 불빛들은 황폐한 산동네 판자촌에서 삐져나온 지독한 가난의 풍경이었습니다. 하긴 한국전쟁이 멈춘 지 불과 6년 후였으니 오죽했을까요. 한국은 전 국토가 폐허가 된 상태였습니다. 그 땅에 첫발을 내디디고, 이후 60년 넘는 세월을 트루디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살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김장환 목사(극동방송 이사장)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젊고 가난한 전도사였습니다.
#풍경2 .. 김장환 목사는 한국전쟁 와중에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했습니다. 온갖 허드렛일과 잔심부름을 했습니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미군 병사 칼 파워스가 ‘단 한 명의 아이라도 구하겠다’고 다짐한 뒤 하우스 보이로 일하던 똘똘한 아이에게 미국으로 가는 배표와 함께 유학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칼 파워스 상사는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탄광촌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 출신이면서도 자신의 재산을 털어 김장환을 후원했습니다. 어린 김장환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밥 존스 고등학교와 신학대, 신학대학원을 모두 마칠 때까지 말입니다. 그런 김장환을 만난 트루디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했고, 남편을 따라서 머나먼 이국땅 한국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1959년, 미국인 여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국인의 눈에는 큰 구경거리였던 시대에 말입니다. 그러니 트루디 여사가 한국 땅에서 헤쳐온 60년 넘는 세월은 절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풍경3 ..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트루디 여사와 마주 앉은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올해 84세입니다. 트루디 여사는 김장환 목사와 결혼하고 지금껏 단 한 번도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한국에 막 도착한 뒤 시댁에서 처음으로 잔치국수를 먹다가 그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작은 생선 한 마리가 육수 위를 헤엄치고 다녔습니다. 그녀는 그런 음식을 난생처음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육수를 내기 위한 마른 멸치였습니다. 기겁한 그녀는 결국 국수를 입도 대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둘이었을까요. 그런데도 그녀는 왜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을까요. 트루디 여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심겨진 그곳에 꽃 피게 하소서. 이게 저의 기도이자 믿음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겟세마네에서 올린 예수의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따집니다. 내가 심어지고 싶은 곳이 있고, 꽃 피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길 열망하고, 그곳이 아니라면 강하게 거부합니다. 심겨지고 싶은 곳에서 꽃 피고 싶어 하지, 심겨진 곳에서 꽃 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십자가 처형을 목전에 두고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가능하면 이 잔이 저를 비껴가게 하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이 기도에는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는 예수의 가슴이 있습니다. 트루디 여사의 기도도 그랬습니다. 자신이 심겨지는 곳, 전쟁이 막 끝난 가난한 한국 땅을 트루디 여사는 자기 십자가처럼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예수의 기도처럼 말입니다.
#풍경4 .. 김장환 목사가 목회를 할 때였습니다. 교회에는 늘 주방과 화장실을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하루 한 번씩, 빠짐없이 깨끗하게 청소를 했습니다. 교인들은 오다가다 칭찬을 했습니다. “아니, 어디서 저렇게 부지런한 외국인 청소부를 구했을까?” 알고 보니 그 청소부는 다름 아닌 김장환 목사의 사모 트루디 여사였습니다. 1978년에는 교회 부설로 중앙기독유치원을 세웠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장애 아동이 다닐 유치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장애아동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함께 생활하다 보면 장애가 없는 아이들이 오히려 더 많이 배우게 마련입니다. 남을 도와주고 배려하는 마음을 익히게 됩니다.” 실제 트루디 여사는 유치원에서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의 통합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었습니다. 트루디 여사는 은퇴할 때까지, 40년간 자신의 월급 통장을 유치원 직원에게 맡겼습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월급을 쓴 적이 없었습니다. 유치원에는 늘 돈이 부족했고, 자신의 몫만 챙길 수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녀는 휴대폰도 없고, 신용카드도 없습니다. 있는 게 오히려 더 불편하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트루디 여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알게 되더군요. 아, 이분은 목회자의 사모이기 이전에 한국땅에 온 선교사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쓴 책을 한 권 출간했습니다. 제목이 『한국에 왜 시집왔나』입니다. 두껍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진실한 마음의 파도가 내내 밀려오는 책입니다.
#풍경5 .. 2006년에 트루디 여사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다발성 골수종 3기였습니다. 척추 일부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수술 후에는 걷지도 못했습니다. 아기의 걸음마처럼, 처음부터 모든 걸 익혀야 했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법부터 자동차에 타는 법까지 말입니다. 책에는 이 와중에 트루디 여사가 올린 기도와 내면에서 들은 성령의 소리가 기록돼 있습니다. “만약 너에게 이런 고통이 없었다면 나와 이렇게 친밀하게 대화할 수 있었겠느냐. 이렇게 작은 일에도 감사할 마음이 들었겠느냐. 네가 지금보다 온유할 수 있었겠느냐. 너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 시련을 주었다. 네가 아파할 때 나 역시 십자가를 지며 걸었고, 네가 고통 속에서 울 때 나도 함께 눈물 흘렸다.” 저는 이 대목에서도 트루디 여사의 꽃을 보았습니다. 심겨지고 싶은 곳이 아니라, 심겨진 곳에서 꽃을 피우는 풍경을 보았습니다. 그 풍경 아래로 예수의 기도가 흘렀습니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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