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서울대학교 합격자
<생활수기 공모 당선작>
가슴 아픈 감동적인 글~^^^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 난 검은 가방
그리고 색 바랜 옷...

내가 가진 것 중에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사전 뿐이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수강료를 내지 못했던 나는 칠판을 지우고 물걸레질을 하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에 하얗게 분필 가루를 뒤집어 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는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다.
하지만 난 결코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홑 잠바를
한겨울에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걸음 뒤에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 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 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 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감고, 질척이는 시장바닥의 좌판에 돌아 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새워 공부했다. 
가엾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인 형은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나는 합격 통지서를 들고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 날도 엄마는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찬밥을 드시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등 뒤에서 엄마의 지친 어깨를 힘껏 안아 드렸다.

'엄마...엄마..., 나 합격했어.....'
나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엄마도 드시던 밥을
채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골목에서 한참동안 나를 꼬~옥 안아 주셨다.

그날 엄마는 찾아오는.단골손님들에게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주셨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운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 주고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그때 나는 시퍼렇게 얼어있던 형의 얼굴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시장 한 구석에 있는
순대국밥 집에서 우리 가족 셋은 오랜만에 함께 밥을 먹었다. 엄마는 지나간 모진 세월의 슬픔이 복받셨는지 국밥 한 그릇을 다 들지 못하셨다.

그저 색 바랜 국방색 전대로 눈물만 찍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기뻐했을텐데...
너희들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원래 심성은 고운 분이다.
그토록 모질게 엄마를 때릴만큼 독한 사람은 아니었어.
계속되는 사업 실패와 지겨운 가난 때문에 매일 술로 사셨던 거야. 그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몸이 성치 않은 자식을 둔 애비 심정이 오죽했겠냐? 내일은 아침 일찍 아버지께 가 봐야겠다.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알려야지."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는데,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들 앞에서 엄마를 때렸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끝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나는 우등상을 받기 위해
단상 위로 올라 가다가 중심이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계단 중간에서 넘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 온 몸이 아팠다.

그때 부리나케 달려오신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얼른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잠시 뒤 나는 흙 묻은 교복을 털어 주시는 엄마를 힘껏 안았고 그 순간, 내 등 뒤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한번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공부 하다가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에 들렀는데 여학생 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그날 따라 절룩거리며
그들 앞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구석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측은해 보일까봐, 그래서 혹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까봐 주머니 속의 동전만 만지작 거리다가 그냥 열람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흰 연습장위에 이렇게 적었다.

'어둠은 내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둠에서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건 굽이굽이 고개 넘어 풀꽃과 함께 누워계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지루한 어둠 속에서도 꽃등처럼 환히 나를 깨어 준 엄마와 형에게 사랑을 되갚는 일이다.

지금 형은 집안일을 도우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한 시간씩 큰소리로 더듬더듬 책을 읽어가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발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오늘도 나는 온종일 형을 도와 과일상자를 나르고 밤이 되서야 일을 마쳤다.

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문득 앙드레말로의 말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는 너무도 아름다운 말이다.

그 후 이 학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우주항공을 전공하여 박사과정에 있으며
국내의 굴지 기업에
전부 뒷바라지를 하고 있으며 어머니와 형을 모두 미국으로 모시고 가서 같이 공부하면서 가족들을 보살핀다고 합니다.

이글은 한번만 읽기보다는
두서너 번 읽을수록
가슴에 뜨거운 전류가 흐른다.사람이 살아 가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울 적에 올라가던 암벽에서 생명줄인 밧줄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랑이나 행복. 성공을 너무 쉽게 얻으려고 하고 노력도 해보기전 너무도 쉽게 포기 하려고 한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이런 글에서 배워야 하리라.

인간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자신이 가장 힘든줄 알고 있지만
우리 주위에는 힘들고 이겨내지 못할 고통을 이겨내며 노력하는 숱한 사람 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듯 합니다.~♡♡💞

🏃‍♀️힘내세요 🏃‍♂️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어느 선술집 벽에 있는 낙서/일본

일본에 주재원으로 23년 살다온 친구가 12월 초에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가 어느 선술집 벽에 있는 낙서를 사진으로 찍어서 번역해준 건데 웃기면서도 의미가 심장합니다.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두 줄 읽고 웃고, 두 줄 읽고 무릎 치고... 와, 뭔가 조금은 통달한 '꾼'이 끄적거린 거 같습니다. <18 81="">  사랑에 빠(溺)지는 18세  욕탕서 빠(溺)지는 81세  도로를 폭주하는 18세  도로를 역주행하는 81세  마음이 연약한 18세  온뼈가 연약한  81세  두근거림 안멈추는 18세  심장질환 안멈추는 81세  사랑에 숨막히는 18세  떡먹다 숨막히는 81세  수능점수 걱정하는 18세  '혈당/압'치 걱정의 81세 아직 아무것 모르는 18세 벌써 아무것 기억無 81세  자기를 찾겠다는 18세  모두가 자기를 찾고 있는  81세. ———-!———!—— 몸에좋고 인생에 좋은 피자 열판 보내드립니다.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허리피자 가슴피자 어깨피자 얼굴피자 팔다리피자 주름살피자 내형편피자 내인생피자 내팔자피자 웃음꽃피자 오늘부턴 신년까지 늘 웃음과 행복한 일만 가득하세요.**

🌶 고 추 장  🌶

🌶 고 추 장  🌶 고추장에 관해서 특별한 체험이 있다. 뜻하지 않게 갈비뼈가 부러져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의 일이다. 한개도 아니고 열개씩이나 골절되어 꼼짝달싹을 못하고 아편으로 통증을 겨우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혈압이 올라가고 혈당이 올라가 혼수지경에 이르니 보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내도 어떻해서든지 날 살려보려고  정성을 다해 음식을 해왔지만 모두가  헛수고일 뿐이었다. 나 또한 집사람을  혼자 살게 만들면 천벌을 받겠기에 열심히 음식을 먹으려 애를 썼지만 구역질만 더 할 뿐이었다. 여행다닐 때 고추장 단지를 꾀차고 다니며 햄버거에 발라먹던 생각이 나서 고추장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고추장을 죽에 넣어 먹으니 신통하게 잘 넘어가는데 그 맛 또한 기가막혀 부글거리는 뱃속까지 편안해졌다. 덕분에 문병오는 사람마다 고추장 단지를 가져오는 바람에  고추장 벼락을 맞을 지경이 되었다. 그 후로는 고추장 단지가 내 식탁에 주인이 되었다.   고추장에 무슨 성분이 들어 있고 무슨  작용을 하는지는 몰라도 신통하기 짝이 없었다. 소태 같던 입맛이 꿀맛이요,  구역질도 잠잠해지고 느글거리던  뱃속까지 고분고분 고추장말을 잘 들으니 과연 고추장의 위력이 대단하다. 내 미국 친구들이 겨울만 되면 단골처럼 감기로 골골대고 있을 때 나는 감기가  뭔지도 모르고 지내고 있다.  그들이 날보고 너는 어떻게 감기 한 번 안걸리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내가  건강한 것은 김치 파워야.  너희들도 김치를 먹어라." 하고  자랑을 했는데 이제는 고추장의 효능이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어린 아기를 달랠 때 호랑이 나온다 하면 뚝 그치고, 순사 온다 하면 뚝 그치듯이 뱃속이 앙탈을 부리면 고추장 먹는다  하면 조용해 질 것 같다.  고추는 남미와 아프리카가 원산지란다. 고추의 매운 맛은 알카로이드의 일종인 캡사이신 때문이란다. 이 캡사이신이  자극을 주어 발효작용을 해서 감기 열을 내리기도 하고 위도 자극해서 위액 분비를 촉진해

우리 아버지 마음 (실 화 (實話))

우리 아버지 마음 (실 화 (實話)) " 헤아릴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 !"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첩첩산중에 상당히 가난한 곳이다.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가정 형편도 안 되고 머리도 안 되는 나를 대도시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나는 대구 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정말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에서 나의 석차는 68/68, 68명 중에 꼴찌를 했다. 지독하게 부끄러운 성적표를 들고 고향으로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표를 부모님께 내밀 자신이 없었다. 무학의 한을 자식을 통해서 풀고자 했는데, 맨 꼴찌라니...! 끼니도 제대로 못 잇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부모님을 떠올리면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 지우개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 1등으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 드렸다. 아버지는 초등 학교도 못다닌 무학이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말했다. "찬석이가 공부를 잘했더나 ? 아버지가 말했다. "앞으로 두고 봐야제, 이번에는 우짜다가 1등을 했는가배...!" "아들 하나는 잘 뒀구먼, 1등을 했으면 잔치를 해야제!" 그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 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 뿐인 우리집 돼지를 잡아 동네사람들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 집 재산목록 제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부지 ~ !"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서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쥐어 박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