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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칼럼] 상급, 기쁨, 평안이 유보된 자들

[이경섭 칼럼] 상급, 기쁨, 평안이 유보된 자들

입력 : 2017.03.30 16:26

이경섭 응답하라 개혁신학
▲이경섭 목사.
완결된 칭의를 갖지 못해 율법의 요구 아래 있는 칭의 유보자들은, 상급도 유보됩니다. 그들의 모든 선행은 칭의를 대기에도 부족해 남길 잉여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상을 기대하는 것은 월급을 차압당한 신용불량자가 재산을 축적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셈이 정확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며, 먼저 죄 빚부터 갚으라고 호통치십니다.


비슷한 예가 성경에도 나옵니다. 온종일 농장에서 일하고 귀가해, 주인의 식사를 수종들면서도 사례(賞) 받지 못하는 어느 종(從)의 이야기입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눅 17:7-9)."

자신들의 공덕으로 칭의에 대기도 모자라는 칭의유보자들이, 언감생심(焉敢生心) 상(賞)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음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라는 이가, 그리스도의 의와 인간의 공덕이 합하여-초자연적인 은혜와 일반 은혜가 손을 맞잡아-칭의를 완성시키고 상급까지 받을 수 있는 셈법을 만들어, 칭의 유보자들의 공복감을 채워주려고 했습니다.

물론 모두 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혹자는 탁월한 공덕으로 칭의는 물론 잉여의(剩餘義)까지 산출해내기도 하지만, 혹자는 공덕이 변변찮아 겨우 커트라인만 넘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아예 공덕이 모자라 마리아나 성자들의 잉여의(剩餘義)를 분여 받거나 연옥의 담금질을 통해 칭의를 완성합니다. 인간의 공덕으로 칭의를 완성한다는 이들의 의인(義人) 개념은 당연히 우리의 의인 개념과 다릅니다.

그들에게 있어 성경의 욥, 다니엘 같은 의인들은, 우리가 이해하듯 성화를 크게 이룬 사람이 아니라, 고급진 칭의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즉 그들의 탁월한 공덕으로 극상품의 칭의를 이뤄 낸 사람들입니다. 칭의라고 다 같은 칭의가 아니고, 평범한 범인(凡人)의 칭의가 있고 고급진 의인의 칭의가 있다는 말입니다.  로마천주교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과 순교를 드린 복자(the Blessed) 성인(Saint)이 이룬 칭의입니다.
이런 의인들에게는 잉여의(剩餘義)가 있어, 칭의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에게 의를 분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토미즘(Thomism), 소위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연원된, 초자연적 은혜와 일반 은혜가 손잡는 신인협력설(synergism), 칭의의 차등과 천국과 연옥을 구분짓는 계급주의(Hierarchism)는 성경에서 나지 아니한 요설(妖說)이기에 무의미하며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반면 이신칭의론자들은 그들의 선행이 아무리 대단해도,-예컨대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를 하고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불사른다 해도-그것들이 털끝만큼도 칭의에 소용되지 못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칭의는 오직 믿음에만 의존시키고, 선행은 성화 영역으로 돌립니다. 그들은 칭의 유보자들처럼 칭의와 유보를 '섞어찌개'로 만들지 않고 둘의 한계를 뚜렷이 구분 짓습니다.

"신자의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더라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에 그것이 죄를 사하거나, 칭의를 얻는 공로가 될 수 없지만, 그 불완전한 행위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대로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게 되는 근거가 된다. 심지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냉수 한 컵을 제공한 것조차도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행위는 믿음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일에 있어서는 필요하지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과는 별개의 일이다. ... '칭의 이후의 행위도 역시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에 죄성을 벗어날 수 없는데, 그렇다면 상급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항의할 수도 있겠지만, 죄책이 온전히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John MacArthur)."

이신칭의로 율법의 빚이 다 청산됐다고 믿는 이신칭의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선행이 상급으로 돌아온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이신칭의가 자신들의 소소한 작은 선행을 가치롭게 만들어준다고 믿으며 그들에게 오는 선행의 기회를 흘려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선을 행하면서도 선을 선되게 하는 칭의에 더 주목하므로 교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가 이신칭의가 신자의 상급의 기초라고 말한 것은 같은 시사점을 담고 있습니다. "신자의 칭의가 단순한 죄사함이나 죄에 합당한 형벌로부터의 사면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의에 대한 상급인 내세의 영광을 얻게 되는 자격도 부여한다."

이렇게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믿는 이신칭의자들에게는, 의에 있어 저급, 고급의 차등없이 다 동일합니다. 이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기에 의(義)에 차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평생 율법의 흠이 없었던 바울 같은 율법주의자도, 광야에서 오직 기도와 절제된 삶을 영위했던 세례 요한 같은 금욕주의자도, 또한 평생 악행만 하던 십자가의 강도도 모두 똑같이 예수 믿어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칭의가 유보되면 기도 응답도 유보됩니다. 성경은 기도 응답의 전제를 '칭의'와 '하나님 아들 됨'에 둡니다. 실제로 성경은 곳곳에서 의로운 자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요 9:31)".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벧전 3:12)".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웨인 스피어(Wayne R. Spear)는 칭의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헐므로 우리에게 기도의 특권을 안겨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의해 그는 죄의 장벽을 제거 하셨으며, 그리하여 그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과 구속받은 자들 사이에 있는 새로운 관계의 특권들 중의 하나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완천한 구속에 의존할 뿐 아니라 또한 그의 계속적인 제사장 직임에 의존 하고 있다."

그리고 '칭의'와 '아들 됨'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이는 의롭다 함을 받아 율법의 종에서 해방된 자는 하나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갈 4:5). 칼빈(John Calvin)이 기도를 말하면서 '이신칭의'와 '양자의 영'을 함께 묶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기도 문제도 역시 이신득의 교리와 연결된다. ... 사람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구원을 얻을 방법이 전연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른 어떤 방면에서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득의(得義)를 통해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 안에 예비되어 있는 줄로 확신하는 모든 축복을 기도로써 간구할 용기를 얻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자의 영'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이 양자의 영은 우리 마음에 복음의 증거를 인치신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뢸 용기를 주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이다(A. Dakin)."

따라서 칭의가 유보되면 기도의 응답도 당연히 유보됩니다. 물론 칭의유보자들에게도 기도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기도 기능이란 기껏 계몽주의자들의 기도 개념인 암시와 자기 강화의 개념, 혹은 이슬람의 '신의 뜻대로 되어지이다'는 숙명론적인 '수용(受容)' 개념만 있을 뿐, 응답을 구하는 적극적인 간구 개념은 없습니다.

또한 칭의가 유보되면 기쁨도 유보됩니다. 성도의 지고의 기쁨은 칭의에서 나옵니다. 성경 중 기쁨의 최절정을 묘사한 구절을 들라하면 누구나 시편 126장 1-3절을 드는데, 이는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감격과 희열을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 126:1-3)".

여기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는, 칭의로 율법과 죄의 포로에서 놓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칭의의 기쁨이 그들로 하여금 꿈꾸는 것 같이 황홀하게 만들고,  입과 혀에 웃음과 찬양이 가득하게 합니다. 다윗과 이사야 역시 기쁨의 원천을 '의와 구원'이라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사 61:10)." 바울 사도가 언급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 1:8-9) 역시 구원으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특히 근엄하고 건조해 보이는 개혁주의 신학이 칭의를 기쁨의 원천으로 지목하며, 기쁨을 강조하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다음의 인용 문서들은 개혁주의 신학을 교조적이고 웃음기 없는 냉냉한 신학이라고 매도해온 것이 잘못임을 말해줍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은 "금생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에게 속하는 유익"을 "성령 안에서 기뻐함"이라고 했고, 부캐넌(James Buchanan. 1804-1870) 역시 믿음의 기쁨을 칭의가 주는 특권으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무조건적 선물로서, 그리고 모든 신자들의 현재적인  특권으로서, 즉시 '믿음의 기쁨과 평강'을 소유하게 되는 칭의의 특권을 받게 된다(칭의 교리의 진수, 416)."

어거스틴(Augustinus, 354-430)의 스승 암브로스(Ambrose, 337-397)가 기쁨의 원천을 행위가 아닌, 칭의의 원천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구속에 두고 있음도 같은 맥락입니다.
"나는 내가 의롭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속되었기 때문에 기뻐할 것입니다. 나는 죄가 없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내 죄가 용서되었기 때문에 기뻐할 것입니다. 나는 내가 쓸모 있기 때문에 혹은 어떤 사람이 내게 쓸모 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대해 나의 변호자가 되시며, 그의 피가 나를 위하여 흘려졌기 때문에 기뻐할 것입니다(Donald G. Bloesch)."

반면 칭의가 미완결 상태로 유보돼, 자신이 칭의를 받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칭의 유보자들이 구원의 기쁨을 만끽할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물론 그들도 칭의를 말하지만, 그들이 받은 칭의는 그들의 실수로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는 임시 사면장(赦免狀) 같고, 재범으로 바로 철창형에 처해지는 집행유예와 같습니다. 따라서 대법원의 무죄확정 판결을 받은 것과 같은 이신칭의론자들의 감격과 희열 같은 것은 그들에게 언감생심입니다.

마지막으로 칭의가 유보되면 평안이 유보됨을 말하고자 합니다. 현대인들이 절체절명으로 구하는 것이 평안이 아닌가 합니다.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평안을 주는 곳이라면 수도원, 절, 요가원 같은 곳에 가서 참선, 관상, 마인드 콘트롤(Mind-Control) 같은 것을 합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오는 일시적인 짝퉁 평안을 경험하고선 참평안을 발견했다고 호들갑을 떨며, 혹자는 그것에 매료되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이는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경험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불행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은 사람의 마음에서 만들어지거나 독립 품목처럼 어디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칭의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오는 성령의 평안입니다. 평안 없음이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불화 때문에 왔기에, 평안의 누림도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는 데서 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구속을 완수하시고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하신 첫 인사가 '평안하뇨(마 28:9)' 였음은, 구속을 입어 하나님과 화목해진 자에게 오는 첫 번째 은혜가 평안임을 시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나님과 화목하여 이렇게 성령의 평안을 경험한 사람은 절대 짝퉁 평안에 미혹되지 않습니다.

칼빈(John Calvin)은 "믿음에 의한 칭의는 하나님과의 화목(평안)을 의미하며 이는 죄사함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박윤선 박사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을 해석하면서, '성령 안에서 의'란, 성령님의 구원 실시로 말미암아 오는 신앙으로 얻어지는 칭의(稱義)와 및 성화(聖化)를 말하고, '평강과 희락'은 신자가 칭의된 결과로 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죄 사함 이상이다(More Than Forgiven!)>의 저자, 모톤(Timothy S. Morton)은 현재적 칭의로 얻는 성도의 평안에 대해 이렇게 기술합니다.

"칭의를 받은 자, 즉 의롭게 된 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다. 죄인을 저주하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을 얻었다. 그러므로 이제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과 믿는 자 사이에는 어떠한 적대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결코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전하게 쉴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한 자신의 진노를 예수 그리스도께 모두 쏟아 부으셨기 때문이다(롬 5:1-10, 골 1:20, 살전 1:10, 5:9)."

이렇게 평안이 칭의에서 나온다고 볼 때, 칭의가 유보되어 하나님의 외면을 받은 자는 평안이 유보되고 두려움이 그를 지배합니다. 그러나 칭의 유보자들은 그들의 칭의 유보로 인한 두려움을 하나님 경외의 표지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합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사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 심판을 초래하는 두려움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두려움은, 미래를 담보받지 못한 구원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이 아닌, 의롭다함을 받은 자로 하여금 방종하지 않게 하는 일종의 근신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the spirit of fear)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a sound mind)이니(딤후 1:7)." 성경은 엄연히 '근신'과 '두려움'을 구분 짓습니다. 근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두려움은 마귀로부터 옵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이신칭의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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