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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잘하는 말은 거짓말…"

《"내가 가장 잘하는 말은 거짓말…" 성직자의 투명한 고백이 찡했다》 김동길 /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김수환이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것은 사실이지만 개천에서 자란 용은 아니다. 그는 뼈대 있는 집안의 후손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때 순교한 김보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덟 명의 아이들을 고생하며 키워서 순교자의 후손답게 아들 둘을 천주교회 성직자로 만들었다. 김수환은 옹기장사를 하던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의 아호를 '옹기'라고 했다. 그러나 그 아버지조차 김수환이 대구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별세했다. 그 많은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할 책임을 어머니 혼자서 걸머져야만 했다. 김수환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동성상업학교(현 동성중·고교)에 진학했다. 어느 해 일왕 생일(천장절)인 4월 29일에 일왕 생일을 축하하는 글을 쓰라는 학교 당국의 지시가 있었지만, 김수환은 그런 글을 쓰지 않았다.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닙니다"라는 것이 당당한 이유였다. 동성상업학교에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당시 교장이 장면(제2공화국 국무총리·1899~1966)이었는데 설득해도 듣지 않고 그는 끝까지 버티었다. 아마도 순교한 자신의 할아버지를 늘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럭저럭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김수환은 일본 동경에 있는 상지(上智)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학병으로 징집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아예 일본 육군 간부후보생에 지원해 훈련받던 중 조선인으로 일본인에 대해 불온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쫓겨났다는 말이 있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에 입학해 1950년 졸업하고 1951년에는 대구 계산성당에서 서품받고 성직자의 삶을 시작했다.
당시 다음과 같은 일화 한 토막이 있다. 김수환이 성신대학 학생일 때 부산 범일동에 있는 그의 형 김동환 신부가 시무하는 성당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 성당 유치원에 근무하던 어떤 젊은 보모로부터 뜻밖의 청혼을 받았다고 한다. 김수환이 미모 여성의 청혼을 받을 만큼 미남 청년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제 눈에 안경' 이라는 말이 있으니 있을 법도 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가 어떻게 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평생 독신을 서약해야 하는 신부가 될 수 있었을까. 그 여성에게 'No'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성이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최은희 같은 절세의 미인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간의 판단은 자기를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데 입장을 바꿔 볼 때 내가 그런 미인의 청혼을 받았다면 'No'라고 하지 못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가 가톨릭대학 노천강당에서 열렸던 '열린음악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미리 부탁을 해두었는지는 모르나 사회자가 추기경에게 노래를 한 곡 부탁했다. 그때 그는 '등대지기'를 불렀는데 청중이 추기경의 노래를 더 듣겠다고 뜨거운 박수를 보내자 추기경은 김수희의 '애모'를 불렀다. 사실 그 노래에는 성직자가 부르기에는 아슬아슬한 부분이 더러 있지 아니한가?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라는 말도 추기경 입에서 나오기는 어려운 말이고 특히 마지막에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여" 라는 가사도 어색하다. 그런데 그가 이 노래를 꼭 한마디만 바꾸어 부른 것도 추기경답다고 하겠다. 그는 "당신은 나의 남자여" 대신 "당신은 나의 친구여"라고 고쳐 불렀다. 김수환 아니고는 불가능한 특유의 재치였다고 생각된다. 이런 일화가 또 하나 있다. 추기경은 여러 나라의 말을 다 잘한다는 소문이 있어 기자들이 무슨 계제에 물었다고 한다. "추기경님은 여러 나라 말을 다 잘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느 말을 가장 잘하십니까?" 추기경은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가장 잘하는 말? 내가 가장 잘하는 말은 거짓말이지." 그 말을 신문 지상에서 읽고 가슴이 찡했다. 역시 성직자다운 투명한 고백이었다. 김수환도 나도 부득이 독신으로 한평생을 살면서 이성의 유혹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유혹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겠는가! 그럴 때마다 독신자들이 할 수 있는 위선은 거짓말밖에 없는데 성직자인 그가 그런 고백을 했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한결 흥미진진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그와 더불어 군부독재의 어려운 한 시대를 살면서 그가 한국 민주화에 이바지한 커다란 공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군사독재를 반대하는 젊은 학도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데 경찰이 성당에 치고 들어가 농성에 가담한 자들을 모두 검거하겠다고 추기경에게 통보했다. 그는 단호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추기경인 나를 먼저 끌고 가고 그다음에 신부와 수녀들을 끌어가고 그 뒤에야 학생들을 끌어갈 수 있을 것이오." 경찰은 그 말을 듣고 끝내 쳐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군사정권이 잘못된 정권이고 유신헌법이 잘못된 헌법이고 유신체제가 잘못된 체제인 것을 명백히 밝히면서도 박정희의 공은 공대로 인정했다. 추기경 김수환은 말년에 오랜 투병 생활을 해야 했지만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맑은 두 눈에는 총명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웃으면서 육체의 아픔을 이겨냈다. 아직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하여! 2009년 2월 어느 추운 날 그는 하늘나라로 조용히 떠났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남긴 한마디는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세요"였다. 그 유언 한마디가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개신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심지어 무신론자까지도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속인(俗人)들이 명동성당으로 모여들어 장사진을 이루었다. 5일간이나! 요단강 건너가 꼭 만나고 싶은 사람 김수환, 나라 사랑의 본보기 김수환, 주님의 충실한 종, 그의 이름은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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