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名畵 鑑賞(3) /Auguste Renoir ( 프랑스 )


 

名畵 鑑賞(3)
 
Auguste Renoir ( 프랑스 )
( 1841 - 1919 )
르누아르는 1841년  리모주에서 재봉사 집안에 태어났는데,
가정은 가난하여, 12세 때부터 도기 공방에 첨화직공으로 들어가 일했다.
1876년에는 대작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발표하여 이그림에서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광선과 춤추는 군중의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세잔은 자연을 추구했지만, 르누아르는 인간에게
그 흥미를 기울이고 있다.
 후기는 오로지 나부(裸婦)를 추구하여 여인의 육체에 한없는
아름다움을 찾고서는 그 빨간 색조로써 순화된 작품을 남기고 있다
. 빨강, 노랑, 파랑등의 색깔을 선명하게 칠하여 색채 화가라 불리였고,
특히 적색의 표현에 뛰어나 근대 최대의 색채 화가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미술의 우아한 전통을 근대에 계승한 뛰어난 색채가로서
190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만년에는 지병인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에
연필을 매고 그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제작하는 기쁨을 잃지 않았다.

피아노 치는 여인 (1875년)

피아노 치는 소녀들 (1892년)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르누아르의 대표작이다.
그의 작품 중 걸작으로 손꼽히며 많은 미술평론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는 작품이라고 한다
 
 
 
두 자매 (1881년)
르누아르는 1881년에 이 걸작을 완성였다
배경은 센 강 옆 마을에서 영업 중이던 레스토랑 의 테라스다.
봄의 아름다움과 젊음의 생기발랄함을 축하하고 있는 두 자매는
기법적으로나, 구성적으로나 르누아르의 대역작이다.
두 소녀의 얼굴은 매우 아름답게 표현되었으며
뒤로는 생기발랄하게 흔들리고 있는 나뭇잎들의 풍경이
깔끔한 윤곽을 보여주면서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앙리오 부인  (1876년)
그림 속 여인이 너무 아름다워 한눈에 반해 버렸다.
당시 파리 연극계 최고 스타였던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의 배우
앙리오 부인에게 르누아르는 '하늘에서 온 천사 같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줄리 마네의 초상 (1898년)
전시된 그림 중 우울한 그림이 있다면 이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줄리 마네는 르누아르와 같은 인상주의 여류화가
베르트 모리조의 딸로 이 그림은 줄리의 어머니 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바느질하는 마리 (1882년)

이랜느 카앙 단베르양의 초상 (1880년)
은행가인 루이 카앙 단베르 씨의 귀여운 막내 딸인 그녀의 투명한 피부와
다소곳이 모아진 두 손,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수줍은듯한 두 눈은
보는 이의 마음에 애잔스러운 심상을 부여한다.
초상화,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과 아이들의 생기 발랄함을
눈부시게 빛나는 색체 표현으로 화폭에 담아내었다.
 
 
 
 
 
 
 



 
 


 
 
 
 


 

 
 
 


 

 
 


 

샤루팡티에부인과 아이들 (1878년)

물랭 드 라 갈래트의 무도회 (1876년)
르누아르의 최고의 걸작이라 손꼽히는 <물랭 드 라 갈래트의 무도회>는
몽마르뜨 언덕 풍차 근처 작은 정원에서 열리고 있다
. 금발의 홍조를 띤 여인들은 환하게 웃으며 남성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춤을 추면서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없이 안무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무지개처럼 빛나고, 캔버스 곳곳에는 행복한 기운이 감돈다
 
보트 파티에서의 오찬 (1881년)
 
아스니에르의 센강변 (1879년)
 
샤투의 노젓는사람들 (1879년)
 
베네치아 산마르코 (1881년)
 

 
 
 
와그몬트의 장미공원 (1879년)
 
 
 
 
 
농장에서 (1878년)
 
 
 

 


 
 
 
 
 


목욕하는 여인들 (1887년)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어느 선술집 벽에 있는 낙서/일본

일본에 주재원으로 23년 살다온 친구가 12월 초에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가 어느 선술집 벽에 있는 낙서를 사진으로 찍어서 번역해준 건데 웃기면서도 의미가 심장합니다.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두 줄 읽고 웃고, 두 줄 읽고 무릎 치고... 와, 뭔가 조금은 통달한 '꾼'이 끄적거린 거 같습니다. <18 81="">  사랑에 빠(溺)지는 18세  욕탕서 빠(溺)지는 81세  도로를 폭주하는 18세  도로를 역주행하는 81세  마음이 연약한 18세  온뼈가 연약한  81세  두근거림 안멈추는 18세  심장질환 안멈추는 81세  사랑에 숨막히는 18세  떡먹다 숨막히는 81세  수능점수 걱정하는 18세  '혈당/압'치 걱정의 81세 아직 아무것 모르는 18세 벌써 아무것 기억無 81세  자기를 찾겠다는 18세  모두가 자기를 찾고 있는  81세. ———-!———!—— 몸에좋고 인생에 좋은 피자 열판 보내드립니다.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허리피자 가슴피자 어깨피자 얼굴피자 팔다리피자 주름살피자 내형편피자 내인생피자 내팔자피자 웃음꽃피자 오늘부턴 신년까지 늘 웃음과 행복한 일만 가득하세요.**

🌶 고 추 장  🌶

🌶 고 추 장  🌶 고추장에 관해서 특별한 체험이 있다. 뜻하지 않게 갈비뼈가 부러져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의 일이다. 한개도 아니고 열개씩이나 골절되어 꼼짝달싹을 못하고 아편으로 통증을 겨우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혈압이 올라가고 혈당이 올라가 혼수지경에 이르니 보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내도 어떻해서든지 날 살려보려고  정성을 다해 음식을 해왔지만 모두가  헛수고일 뿐이었다. 나 또한 집사람을  혼자 살게 만들면 천벌을 받겠기에 열심히 음식을 먹으려 애를 썼지만 구역질만 더 할 뿐이었다. 여행다닐 때 고추장 단지를 꾀차고 다니며 햄버거에 발라먹던 생각이 나서 고추장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고추장을 죽에 넣어 먹으니 신통하게 잘 넘어가는데 그 맛 또한 기가막혀 부글거리는 뱃속까지 편안해졌다. 덕분에 문병오는 사람마다 고추장 단지를 가져오는 바람에  고추장 벼락을 맞을 지경이 되었다. 그 후로는 고추장 단지가 내 식탁에 주인이 되었다.   고추장에 무슨 성분이 들어 있고 무슨  작용을 하는지는 몰라도 신통하기 짝이 없었다. 소태 같던 입맛이 꿀맛이요,  구역질도 잠잠해지고 느글거리던  뱃속까지 고분고분 고추장말을 잘 들으니 과연 고추장의 위력이 대단하다. 내 미국 친구들이 겨울만 되면 단골처럼 감기로 골골대고 있을 때 나는 감기가  뭔지도 모르고 지내고 있다.  그들이 날보고 너는 어떻게 감기 한 번 안걸리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내가  건강한 것은 김치 파워야.  너희들도 김치를 먹어라." 하고  자랑을 했는데 이제는 고추장의 효능이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어린 아기를 달랠 때 호랑이 나온다 하면 뚝 그치고, 순사 온다 하면 뚝 그치듯이 뱃속이 앙탈을 부리면 고추장 먹는다  하면 조용해 질 것 같다.  고추는 남미와 아프리카가 원산지란다. 고추의 매운 맛은 알카로이드의 일종인 캡사이신 때문이란다. 이 캡사이신이  자극을 주어 발효작용을 해서 감기 열을 내리기도 하고 위도 자극해서 위액 분비를 촉진해

우리 아버지 마음 (실 화 (實話))

우리 아버지 마음 (실 화 (實話)) " 헤아릴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 !"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첩첩산중에 상당히 가난한 곳이다.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가정 형편도 안 되고 머리도 안 되는 나를 대도시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나는 대구 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정말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에서 나의 석차는 68/68, 68명 중에 꼴찌를 했다. 지독하게 부끄러운 성적표를 들고 고향으로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표를 부모님께 내밀 자신이 없었다. 무학의 한을 자식을 통해서 풀고자 했는데, 맨 꼴찌라니...! 끼니도 제대로 못 잇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부모님을 떠올리면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 지우개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 1등으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 드렸다. 아버지는 초등 학교도 못다닌 무학이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말했다. "찬석이가 공부를 잘했더나 ? 아버지가 말했다. "앞으로 두고 봐야제, 이번에는 우짜다가 1등을 했는가배...!" "아들 하나는 잘 뒀구먼, 1등을 했으면 잔치를 해야제!" 그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 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 뿐인 우리집 돼지를 잡아 동네사람들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 집 재산목록 제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부지 ~ !"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서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쥐어 박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