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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있습니까


» 자동차 사고로 목 아래로는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지만 각종 보조공학 기기의 도움으로 새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상묵 교수 (44·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희망이 있습니까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이상묵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이주했던 그는
해양학자가 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열심히 공부한 결과 서울대에
입학해 해양지질학을 전공합니다.
 이후 국비유학생으로 미국 MIT에서
지구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가 됐습니다.

1년에 평균 3개월을 바다에서 지내며
해저 지형을 연구하던 이 교수는
 2006년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공동으로 진행하는
데스밸리 지질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합니다.

학생들에게 과학자의 자세를 가르치기 위해
이 교수가 추진한 사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차량 전복사고를 당해 목 아랫부분을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고 맙니다.

 절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이 교수는 부단히 재활훈련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적과 같이 6개월 만에 강단에 복귀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담은 책 ‘0.1그램의 희망에서
이 교수는 하늘은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희망이라는 단 하나를 남겨주셨다고 말합니다.

결국 희망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라는 잠언 211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정신을
차리게 하고, 희망을 갖게 해줍니다



 “덤으로 얻은 인생 2막 장애인 권익 위해 노력”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② 한국의 ‘스티븐 호킹’ 이상묵 교수
절망 속 헤매다 ‘모르는’ 교수 ‘1억기부’ 받고 회생
“또 다른 기부 이어지는 아름다운 기부 문화 희망”

여 기 장애와 가난, 그리고 절망의 끝자락에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일으켜 세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희귀 질환과 중증 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이 땅에 우뚝 선 장애인들입니다. <한겨레>와 푸르메재단이 공동으로 펼치는 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우뚝 선 장애인> 시리즈를 통해 이들을 소개합니다.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 배형진씨의 이야기 <산으로 간 ‘말아톤’>를 시작으로, 한국의 ‘스티브 호킹’이라고 불리우는 이상묵 서울대 교수, 전동휠체어로 35개국을 횡단한 최창현씨, 운동 도중 하반신 마비가 됐지만 존스홉킨스대학 재활의학과 의사로 우뚝 선 이승복 박사 등 20여명의 장애인의 진솔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 고통을 딛고 일어선 장애인들의 이야기는, 독자 여러분들께 왜 우리 삶이 소중하고 희망을 가져야 하는가를 말해 줍니다. 이 캠페인을 통해 우리 사회가 새로운 희망을 움켜쥐길 기대합니다. 
 
“지질조사를 위해 서울대학교 석박사 과정 학생들과 함께 찾았던 미국 캘리포니아 사막. 그 한복판에서 야영을 한 지 9일째였다. 신기하게도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불빛 하나가 유난히 저 멀리서 반짝였다. 이 지역 유일한 메디컬 센터 Kern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오전 헬리콥터에 의해 그 곳 옥상에 내려질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지난 2006년 7월 2일. 캘리포니아 사막 비포장 도로. 이상묵 교수(44·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가 몰던 자동차가 갑자기 뒤집혔다. 차량 지붕이 그의 목을 짓눌렀다. 호흡이 끊겼다. 동행했던 외국 학생의 심폐소생술. 곧 도착한 헬리콥터가 메디컬센터 옥상에 이 교수를 내려놓았다. 불과 40분 만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 사고 이틀 전 캘리포니아 지질조사때의 이상묵 교수.



수술 후 3일 뒤 의식이 깨어났다. 왜 자동차가 전복되었는지 사고 순간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단지 긴 여행을 다녀 온 기분이었다.


“정말 생생한 꿈이었어요. 몸이 가벼워지면서 떠오르는, 종교는 없지만 가톨릭의 고해성사처럼 내 인생을 돌아보는 꿈이었어요. 꿈은 3편으로 이어지는데 끝은 내가 죽어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난 결국 다시 살아나요.”
꿈속에서 경험한 죽음은 무섭거나 두렵지가 않았다. 죽었고,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 누구라도 붙잡고 꿈에서 경험한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기도에 꽂힌 튜브 탓이다. 안 나오는 목소리로 말을 하려니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한국에 있는 아버지께 전화를 하시는데 상묵이 머리가 온전하지 않은 것 같다고, 이상한 소릴 자꾸 한다면서 우시는 거예요.”(웃음)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이상묵 교수는 본인이 어떤 상태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의료진 모두 그에게 ‘너처럼 이렇게 회복 속도가 빠른 사람은 없다’, ‘수술이 정말 잘 됐다’며 긍정적인 이야기만 들려줘서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작스런 사고, 그리고 ‘청천벽력’ 전신마비 판정
 
남캘리포니아대학(USC) 병원으로 옮겨져 정밀검사가 들어갔다. 그 곳에는 신경외과 권위자가 있었다. 그 의사는 단호하게 말 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제로는 아니니까 희망은 잃지 말라고. 그때 처음 알았다. 평생 전신마비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야! 상묵! 이런 난관은 머리를 써서 빠져나올 수 있어! 당장 과학 재단에 제출해야 하는 제안서가 있어도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충분히 잘 해왔잖아! 당황 하지마! 당황 하지마! 이번엔 제대로 걸렸어. 구덩이에 빠졌어. 야! 하늘! 이 거 내 각본 맞아? 감독 어딨어?’
허망했다. 이렇게 도중하차를 시키다니. 혹시 그동안 무슨 잘못을 했던 것은 아닐까? 이상묵 교수는 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나 생각했다. 처음 떠오른 사람은 동생들이었다.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남동생과 여동생은 본의 아니게 차별을 받았다. 촛불 시위감이다. 훗날 여동생에게 말하니 동생은 “오빠는 어렸을 때부터 유전자가 우리와 달랐어!” 하며 시원하게 웃었다.
재활치료로 유명한 랜초 로스 아미고스 국립재활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은 척수마비, 뇌손상 등 신경 마비 중증 환자들뿐이다. 그러나 손상이 이상묵 교수 보다 심한 사람은 없었다. 사고 당시 차 지붕에 목이 짓눌려 뇌와 가까운 4번 척추를 다친 교수는 목 아래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는 사지마비였다.
“제가 병실에서 반장이었어요. 한번은 나와 같이 완전 손상인 줄 알았던 한 환자가 어느 날 휠체어를 조이스틱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알고 보니 손가락 신경이 돌아온 거죠 바로 그 날로 절교 했죠.”(웃음) 



» 지질조사에 참여했던 서울대 학생들과 현지 스태프의 사고 직전 기념사진.




재활치료는 물리치료와 작업치료로 이뤄진다. 완전마비인 이상묵 교수에겐 물리치료는 소용이 없었다. 작업치료센터인 CART(Center for Advanced Rehabilitation Technology)에서 신경 마비 환자의 활동을 돕는 보조공학기기 7~8가지 중 가장 적합한 모델을 찾는 과정을 거쳤다.
사고가 발생한 지 정확히 3개월 후. 2006년 9월 23일. 이상묵 교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고가 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난 돌아가야 한다. 날 기다리는 연구실, 제자, 동료가 기다리는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며칠 후 늦은 밤, 아버지가 병실을 찾아 오셨다.
“상묵아! 너는 명예를 잃지 않았다. 영어 선생을 하면 그 전보다 더 많이 벌수가 있다. 학교로 복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냉철한 아버지가 아닌가! 그런 아버지가 뜬구름 같은 이야길 하신다. 이 교수는 최첨단 휠체어와 각종 공학기기를 갖춘 본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학생들의 표정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뒤늦게 접한 제자 사망 소식…장애보다 깊은 절망 속으로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곧이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셨다. 다름 아니라 사고 당시 학생 한 명이 숨졌다는, 지금껏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 말이다. 매우 특별한 학생이었다.
‘바다의 탐구’라는 자신의 강의를 열심히 듣던 여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은 수업을 들은 날이면 어김없이 쌍둥이 언니에게 무엇을 배웠는지 들려주며, 인생의 진로를 해양지질학으로 결정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지난 7월에 떠난 사막지질탐사는 학부생은 같이 갈 수 없는 석박사 연구과정이었다. 학부생인 그 여학생은 기어코 동행하기를 원했고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으로 참가비 200만원을 제일 먼저 접수했다. 그 학생이 같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당시 유일한 사망자였다. 



»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이 교수의 강의 광경.




기자들은 한결같이 물어본다. 언제가 가장 힘들었냐고. 이상묵 교수는 그 때 그 순간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아버지께 그 학생이 저세상 사람이 됐다는 이야기를 듣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다. 나 혼자 다쳤으니 조금 불편하지만 떳떳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돌아갈 수가… 없다.’
일주일 후 학교로부터 전화가 왔다. 공과대학 이건우(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가 ‘경암학술상’으로 받은 상금 1억 원 전액을 자신에게 기부한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를 한다곤 하지만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분이, 그것도 공과대학 교수가 자연대 교수에게 거액의 돈을 기부하다니!
“훗날 이건우 교수를 뵙고 처음 드린 인사말이 뭔지 아세요? 바로 ‘저 아세요? 저는 전혀 모르는데, 저 아세요?’ 였어요.”(웃음)
이건우 교수는 이상묵 교수에게 돈 이상의 것을 주었다. 바로 삶의 전부인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학교와 동료 교수들의 응원과 격려가 이어졌다. 

‘생면부지’ 동료 교수가 내민 ‘구원’의 손 
 
2007년 1월 2일. 드디어 학교로 돌아왔다. 사고가 난 지 정확하게 6개월이 지난 때였다. 조금 느릴 뿐 강의 준비, 연구에 전혀 불편함은 없다. 하늘은 이상묵 교수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 가진 않았다. 최소한의 것은 그에게 남겨 놓았다. 보통 사람 폐의 40%라고는 하지만 횡격막을 다치지 않아 말을 할 수가 있고 뇌를 다치지 않아 연구와 강의에 전혀 문제가 없다.
“내가 교수를 직업으로 선택 한 것, 다친 것 모두 우연이 아닐 것 같아요. 내가 만약 고등학교 교사였으면 다시 복귀하는 것은 힘들었겠지요. 학생들 야단치기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대학 교수는 학위 안 주면 되거든요.(웃음)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어 전 행복합니다.”
올 3월에서야 처음으로 대학신문에 기사가 실렸다. 지난 1년 8개월 동안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죽은 학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장애인이 된 지 햇수로 2년. 이젠 장애인을 위해 움직여야 할 때다.
“내가 대학신문과 인터뷰에 응한 것은 장애인들에게 교훈적인 얘기를 전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팔을 사용할 수 있는 데도 집에 있는 장애인들이 많습니다. 장애 유형에 따른 보조공학기기 등 테크니컬 정보를 알려야 합니다. 장애인의 몸 가운데 한 부분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컴퓨터 조작이 가능합니다. 컴퓨터는 장애인의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건우 교수의 기부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또 다른 기부가 이어지는 아름다운 기부 문화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 생활보조인의 도움으로 전용차량에 오르는 모습.




“장애인 현실 참담”…보조공학 등 선진 재활시스템 ‘전도사’로
언론사에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선진국과 우리나라의 재활치료시스템이 비교되었고, 각 종 보조공학기기가 이슈화 되었다. 정부에서는 장애인을 돕는 생활보조인 홍보 캠페인을 같이 하자고 했다. 그동안 물리치료에만 급급했던 장애재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씨앗이었던 이건우 교수의 기부도 열매를 맺었다. 경암교육문화재단은 이건우 교수가 경암학술상으로 받은 상금 전액을 이상묵 교수의 보조공학기기 구입에 기부한 것을 기리기 위해 같은 금액인 1억 원을 장애인 의료장비 개발 센터 설립에 쾌척했다.
이상묵 교수는 다치고 난 뒤 알았다. 건강하게 5대양을 항해하며 연구했던 삶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이젠 ‘리사이클’ 되어 덤으로 사는 제2막 인생이라고 한다. 이상묵 교수는 장애인이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단지 그 전에는 학자로써, 과학자로서 삶을 살았다면 앞으로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는 삶이 하나 더 추가됐을 뿐이다.
그의 삶은 이 순간, 조용하면서도 쉼 없이, 희망을 향해 계속된다. 

글/사진=어은경 푸르메재단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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