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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이성 도피 아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힘”


이어령 박사는 지난 2010년부터 5년간 양화진문화원에서 매달 한 차례씩 강연 또는 대담을 진행했다. 삶과 가족, 교육에서부터 사회와 경제, 문화를 논했고, 문화와 인물 등을 통한 성경 읽기, 그리고 전공인 소설과 인문학을 통한 ‘영성’ 탐구를 했다. 인생을 회고하는 대담도 진행했다. 본지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인 이어령 박사를 최근 서울 평창동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만나, ‘7년차 기독교인’으로서의 소감을 비롯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음력 설을 맞아, 이를 두 차례로 나눠 게재한다.
[대담=류재광 편집국장, 사진=김진영 기자, 정리=이대웅 기자]

이어령 박사는 “세례를 받고 ‘문지방에 서 있다’고 말했는데, 7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여전히 죄인인 채로 문지방 위에 서 있다”며 “들어온 것도 나간 것도 아닌, 그 문지방 위의 긴장이 존재하는 한 죄인인 채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진영 기자
아무리 바뀌고 변해도 신 앞에선 피조물일 뿐
자신의 죄 인정 않는 사람이 대역죄 짓는 것 

-‘세례’를 받으신지 벌써 7년째가 되셨습니다. 소감이 있으신지요.
“기독교에 입문하고 ‘문지방’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문이 열린 것인지, 더 큰 문이 내 앞에서 닫힌 것인지 모르겠다고. 세례를 받은 사람의 말로는 격에 맞지 않지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문지방을 넘었다는 증거이고 이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이야기인데, 세례를 받고서도 저는 여전히 열린 문으로 들어가 있지 않고 문지방 위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나 마더 테레사의 서한을 보면, 저와 같은 말씀을 하고 있음을 아실 수 있습니다. ‘내가 크리스천이다’, ‘나는 이제부터 무죄한 자이다’는 말은 바로 피조물(被造物)이 조물이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바뀌고 변해도 신(神) 앞에서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피조물은 에덴에서 추방된, 신과 끊긴 상태로, 누구에게나 원죄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선악과를 따 먹은 원죄를 그대로 가중하는 일입니다.
기독교적 논리에 의하면, 최후 심판날에 비로소 심판을 받는 것이지, 면죄부를 받았다거나 세례를 받았다거나 해서 절대로 원죄가 씻길 순 없지요. 단지 덮어줄 뿐, 죄를 심판해서 옳다 그르다 하는 게 아니지요.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인간이 먼저 취한 행동이 앞을 가리고, 하나님 목소리가 나니 덤불에 가서 숨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게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려집니까? 덤불 속에 숨는다고 숨겨집디까?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피조물인 인간이 원죄를 저지른 순간,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초라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래서 덮어주신 것이지요. 그게 가죽옷을 입혔다는 대목인데, 가죽옷은 어디서 났습니까? 인간들은 무화과 잎을 땄지만, ‘가죽옷’이라는 건 벌써 동물의 생명을 전제로 하지요. 피 흘리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를 덮어주기 위해 피가 필요한 것이지요. 대속과 희생, 그게 바로 예수님입니다.

과학에서는 프랙탈(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구조)이라는 게 있습니다. 성서에서도 끝없는 프랙탈로 우주가, 신과 인간의 관계가 설명돼 있습니다. 아담에서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예수님까지, 아주 작게는 교회 목사에 이르기까지, 중재자·대속자로서의 존재가 되풀이돼 나옵니다.

이렇듯 7년 동안의 제 이야기도 그날 세례받고 기자들과 대담한 것이나, 오늘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나 같은 프랙탈인데, 스케일이 커진 것 뿐입니다. 그러니 아직도 저는 문지방 위에, 죄인인 채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크리스천이다’ 하는 말조차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변명이 아니라, 그 마음을 잃으면 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던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이 혼란과 혼돈과 모순, 들어온 것도 아니고 나간 것도 아닌, 그 문지방 위의 긴장이 존재하는 한 저는 죄인인 채로 신 앞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잘 알려졌듯, 이어령 박사는 딸인 故 이민아 목사의 치유를 계기로 2007년 봄 영성의 세계에 들어섰다.
이어령 박사는 과학 이론인 ‘프랙탈’로 자신의 지난 7년을 설명했다. “고사리를 보면, 전체의 모습이 작은 이파리 속에도 들어 있습니다. 눈(snow) 결정이나 들쭉날쭉한 해안도 그렇지요. 그걸 프랙탈이라고 하는데, 성경도 신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우주가 끝없는 프랙탈로 설명돼 있습니다. 7년간의 제 이야기도 그날 세례받은 때나 지금 이 자리나 똑같은 프랙탈인데 스케일만 커진 것입니다.” ⓒ김진영 기자
“그 러나 ‘나는 크리스천이야, (원죄를) 극복했어, 벗어났어’ 하는 순간 그야말로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위선자들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천사들 중에는 사탄이 참 많고, 사탄이라 생각했던 이들 중에는 천사들이 참 많다고 할까요? 이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나오는 인간들입니다.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 아버지를 죽인 혐의를 받은 사람들. 이 사람들의 영혼은 한없이 죄에 물들어 있지만, 끝없이 하나님을 향해 가려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조지마 신부처럼 완전한 사람도, 죽으면 시체가 썩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나는 죄인이 아니야. 나는 무죄해, 나는 하나님의 착한 성도로서 어린 양들을 끌고 가는 지도자야’라고 자부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는 신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하는 대역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오해를 받을까 봐 (기독교에 대한)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그 당시 사탄 취급을 받으셨지요. 자신을 ‘하나님’이라 칭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로마인들이 죽였다지만, 사실 빌라도 총독은 풀어 주려고 했습니다. ‘죽이라’고 외쳤던 군중들은 모두 유대인들, 존경받는 제사장들이었지요. 지금 예수님께서 재림하셔도, 다시 잡아서 심판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 동안 제가 (세례받기 전) 비판하던 말과 같은 말로 착각하겠지만, 전혀 다른 것입니다. (강연했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도스토예프스키, <말테의 수기>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탕자, 돌아오다>의 앙드레 지드 같은 사람들, 심지어 파문당하고 개종까지 했지만 어떤 목사님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글보다 그들의 책이 더 많이 읽히고 성서에도 가깝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들처럼, 지금도 체계화되고 소위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에서는 진짜 예수님 말씀이 그대로 현현됐을 때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용기가 없으니 그냥 있지요(웃음).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면 ‘저 사람 예수 믿는다더니, 맞아?’ 할 정도의 말도 해야 하는데, 한국 기독교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저까지 나서 비판적 입장에 서는 것은 사랑도 아니고 크리스천의 길도 아닙니다.”

-‘문지방’을 언제 넘어서실 것 같으신지요.

“저는 문지방에 서 있는 긴장으로 7년간 계속 왔습니다. 남들은 저를 욕할지 몰라도, 처음 세례를 받았던 그 날을 잊지 않는…. 그리고 제가 크리스천과 넌크리스천의 경계선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음을 숨기지 않고 모든 분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정직한 모습이며, 저와 같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이 언젠가 문지방을 넘어가는 힘이 되어 주는 게 제 역할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죽을 때까지 문지방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웃음). 아까 말씀드렸듯, <고백록>처럼 저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의 깊은 고백을 읽어 보면 저보다 10배는 더 그런 긴장 속에 사셨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맨 끝에 ‘나를 구하소서’라고 합니다. 한없이 흔들립니다. 예수님께서도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나이다’ 라고 하셨지요. 원죄를 짊어진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것을 넘어서신 분이시지요.

이 박사는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교회에 간다면, 그것은 성서를 전혀 읽지 않은 분들”이라며 “예수님은 분명히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이미 해답을 주셨다”고 했다. ⓒ김진영 기자
우리도 그분을 따라가야 하는데, 부활 이후 40일간 천국 가시기 전 달라진 예수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는 그 40일이 우리가 기껏 갈 수 있는 길인데….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고 밤길을 함께 걷는 건, 1백만, 1천만 명 중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말까 한 일이지요. ‘그분이 예수님이셨구나’ 그런 기적 말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달리다쿰’으로 죽은 소녀를 일으키신 것은 기적이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비밀로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능력만 보이신 것입니다. 그 능력을 어디에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돌을 빵으로 만들고, 탑에서 떨어지고, 사람이 왕이 되는 기적의 능력으로 썼다면 예수님은 사탄에게 지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능력으로 사람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셨습니까? 영혼을 구하는 일에 쓰셨지요.”

생명 주러 오셨는데, 우린 왜 빵에 연연하나

-평소 ‘돌을 빵(떡)으로 만드는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시는데요.
“오늘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니 ‘돌로 빵 만드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게 바로 이단이고,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를 어떤 신학자 앞에서도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빵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빵을 부정한 게 아니지만, 말씀은 제쳐 놓고 빵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빵이지, 말씀입니까? 예수님 입장에서 오병이어를 하시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말씀을 전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런데 말씀은 듣지 않고, 오병이어 이야기만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얼마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팔고 있습니까? 성서 보십시오. 예수님은 군중이 몰려오니 산으로 도망치십니다. 얼마나 외로우셨겠어요? 여기 먹으면 죽지 않는 빵이 있는데, 말씀으로 오셨는데, 말씀은 듣지 않고…. 저 오병이어, 먹으면 배부르지만 금방 꺼지는 그것 만들어 줬다고 아우성을 치느냐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능력?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4-5천명을 먹인 것이 뭐 대단하냐 이겁니다. 제자들이 그걸 보고서도 먹을 걸 걱정하니,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보다 몇십 배 중요한 생명을 주러 온 것인데, 먹어도 죽는 빵에 왜 그리 연연하냐’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연연한다면, 그 기적을 보고 교회에 간다면, 그것은 성서를 전혀 읽지 않은 분들이지요. 신학이 아니라도, 저는 문학평론하는 사람으로서, 성서가 어찌 그렇게 읽힙니까? 돌로 빵을 안 만드셨는데, 왜 돌로 빵을 만들라고 합니까? 그러니 자꾸 말씀의 교회가 아니라, ‘의식주 교회’가 되는 겁니다.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이미 해답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광야의 마지막 시험에서 합격하셨지요. 우리가 시험 치면 다 떨어질 걸요(웃음). 목사님이고 교인이고, 교황도 떨어질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걸 덮어주시는 것이지요. 이런 인간의 한계를 알아야지요. 잘난 사람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다 덮어주세요. 정말 착실하게 믿는 목사님들이 잘못 아는 것 있어도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덮는 것과 하나님께서 덮어주시는 것이 같습니까? 다르지요. 하지만 우리는 자꾸 자신을 덮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게 덮어집니까? 우리는 자꾸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덮어주시지요. 그런 의미에서 최후의 심판이 언제 오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오는 것이지요. 그게 프랙탈이구요.”

로고스, 지성과 영성 모두 있어야만 성립돼
-박사님은 ‘지성’의 상징과 같은 분이셨는데, 요즘 강연에서는 ‘영성’을 더 강조하고 계십니다.
“당연하지요. 지성은 제가 할 수 있는 몫이고 50년간 책을 읽으며 가르치고 배워온 것이지만, 제게 가장 결여돼 있는 부분이 영성입니다. 근대 합리주의를 뛰어넘지 못하면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가 ‘무한정신’이라고 한 것이 하나님인데, 인간 정신은 ‘유한정신’이지요. 다음에 물체들과 기계들은 ‘확충’만 있지 ‘생식’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무한정신’, 즉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의 ‘생각’은 무한정신이 아니라 ‘유한정신’입니다. 그러니 신을 인정한 것이지요.

그는 “원죄라는 것은 신이 되려 했던 욕망, 지적 오만”이라며 “하나님이 인간을 질투한 것이 아니다. 아들이 아비와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은 우주의 질서이자 법칙”이라고 말했다. ⓒ김진영 기자

그런데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시계 태엽을 감지만, 움직이는 것은 시계입니다. 그러니 처음에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시고 인간이라는 유한존재를 만드셨지만, 다음에는 간섭하지 않고 우리의 법칙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시계 태엽을 감으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돌아가는 건 우리라는 것이지요. 관여하지 않으신다. 시계가 안 가면 ‘시계 죽었네’ 하고 다시 돌리잖아요?
이것은 유신론(有神論·Theism)이라 하지 않고, 이신론(理神論·Deism)이라고 합니다. 이치로 따진 신, 생각 속에 있는(thinking) 신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무신론보다 더 나쁩니다. 신을 인정하면서도 나와 관계 없다는, ‘죽은 신(Dying God)’이니까요. 그러므로 근대 합리주의 지성을 버리는 게 아니라 그 데카르트적 지성을 넘어서는 것, 우리가 이성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라 이성에서 자유로워지고 이성을 넘어설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숫자나 언어가 아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힘 말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모두 ‘인간이 신 되는 이야기’
기독교만은 어디까지나 피조물로서 가는 것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
“그러니까 성서를 보면, 우리가 다 알아듣기 쉬운 말로 돼 있습니다. 이것은 지성의 언어이지요. 로고스, 말씀은 지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멘, 할렐루야, 호산나, 달리다쿰’처럼, 번역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전 세계가 다 번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멘’ 대신 ‘예, 믿습니다’ 해도 통할 텐데, 왜 안 했을까요? 영성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말로는 번역이 불가능합니다. 그건 지적 언어가 아니라, 영성이 붙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지적인 걸 다 빼내면, 주문(呪文)이 돼 버려요.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지성과 영성이 함께하는 것이 ‘로고스’입니다. 말씀은 지성과 영성이 한 몸 되는 것으로, 둘 중 하나를 빼내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모두 인간이 신 되는 이야기이지요. 나도 믿으면 신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최후 심판에서 영성을 얻는다 해도, 어디까지나 피조물로서, 아들로서 가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친구, 동격(同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게 다른 종교와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신의 입장이 되려는 것이 바로 원죄이고 쫓겨난 이유인데, ‘나는 무죄하고 모든 것이 신과 같다, 그렇게 깨끗한 자다’ 이렇게 원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최후 심판 때 구원을 못 받는 것이지요.

원죄라는 게 무엇입니까? ‘신이 되려 했던 욕망’ 아닙니까? 사람들이 자꾸 원죄가 뭔지 모르는데, 딱 하나입니다.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인간이 신처럼 되는 걸 질투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인데, 자격 없는 이들이 조물이 되려 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비와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싫다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우주 질서를 거역하는 것이지요. 인간이 완전하면 모르겠지만, 자기 판단으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물을 담으려 만든 이 컵이 말하는 능력을 가져서 ‘뜨거운 건 넣지 마’ 하는 것 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컵을 예로 들며 설명하고 있는 이어령 박사. ⓒ김진영 기자
지성은 이미 50년간 제가 쓴 글에 다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영성의 세계가 붙음으로써, 제가 옛날에 신을 욕하고 무신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들도 다 해석과 모든 논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같은 성서이지만, 이전에 무신론자로서 읽었을 때와, 영성 있는 크리스천이 되어 읽는 것이 전혀 다릅니다.

마치 시커멓고 괴상해 보이는 네거티브(negative) 필름을 인화시켜 아름다운 포지티브(positive) 필름으로 바꾸듯 말입니다. 영성은 인화지에 자신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해골처럼 찍혔던 것이 제대로 모습을 갖춥니다. 천국은 사진을 인화하는 곳과 같습니다. 거기에 나를 맡기면, 내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게 신은 아닙니다. 어디까지 ‘아담’이지요.”
-얼마 전에도 교회에서 강연을 하신 것으로 아는데, 목회자나 신학교수과 만나면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누시는지요.
“저는 그분들과 충돌하거나 서로 의견이 다른 게 아닙니다. 그분들은 ‘신학(神學)’을 하시고, 저는 거기서 니은(ㄴ)을 뺀 ‘시학(詩學)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텍스트 읽기를 하고, 그분들은 실천하고 봉사하는, 분류하고 적용하고 요리해 내는 역할이시지요.

제가 문학작품에서 보통 독자들이 못 읽어내는 뜻을 발견해 주듯, 신학에서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플라톤도 같은 이야기를 했지요. 시인들은 공화국에서 내쫓아야 할 존재들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이데아’의 세계를 가장 실감 있게 말해줄 사람은 시 쓰는 사람들이라구요.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데(실낙원), 에덴동산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일은, 시인이기 때문에 어느 목사님들보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이어령 박사의 양화진 문화원 강좌 및 대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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