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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 말싸미"

"나랏 말싸미"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는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제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일이 많은 바 내가 이를 가여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자를 만드노니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편히 쓰게 하고자 함이라.' 세계에 현존하는 언어는 약 6,500 종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중 언어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가 Papua New Guinea로 840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며 두번째로는 Indonesia 로 700개의 언어를 갖고 있다고 하니 서로 이웃인 두 나라를 합하면 전 세계에 통용되고 있는 문자의 대략 1/4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가히 언어천국이라 할 만하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것이 한두개가 아니지만 그중에 으뜸가는 것이 한글이 아닌가 한다. 본문에 인용한 글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 (創制)한 후 반포할 때 발표한 선언문이라고나 할까! 때는 바야흐로 1444년 1월 ! 세계의 어느 문자치고 창제일과 창제자, 창제목적 그리고 창제원리가 정확히 알려진 문자는 한글이 유일하다.
그러나 과연 한글을 누가 만들었는가에 대한 논란은 있을 듯싶다. 모든 기록에는 세종이 왕자들과 공주들의 도움을 받아 수년 끝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것의 활용에 신숙주나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자들이 동참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나라 일에 하루 24시간도 모자랄 왕이 특히 왕자들과 공주들의 도움으로 이런 위대한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집현전 학자들이 모든 공을 왕께 돌리려는 겸허함에서 생겨난 말이 아닌가 한다. 여하간 당시의 왕이 세종이었으로 그에게 모든 공을 돌리는데는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인데 한가지 아이러니는 한글을 반포함에 있어서도 원문은 한문으로 쓰여졌으나 세조 당시 펴낸 '훈민정음 언해본' 이라는 책자에 한글로 표현한 것을 현대식 표현을 가미하여 옮겨 보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중국은 물론 명나라를 지칭하는 것이다. 한글의 우수성을 나만큼 구구절절히 감격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하루에도 수만자를 두드려야 하는 나는 열개의 작은 네모난 공간에 있는 기호를 두드려 표현 못하는 글자가 없으니 영어만 해도 글자의 수가 우리 것보다 많으며 대문자 소문자를 선택하야 할 때가 많으며 독일계통의 문자는 글자 위에 점을 찍는 경우가 많아 아예 표기 자체가 불가능하다. 현재 만국의 공용어랄 수 있는 영어에는 변화무쌍한 발음이 많으며 길고 짧게 내는 발음에 의해 뜻이 전혀 달라지기도 한다. 특히 accent 를 어느 부분에 두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어휘가 않으며 동시에 동음이의어 (同音異意語)가 너무 많아 비영어권 족속들에게 많은 도전을 던져주고 있으며 중국어는 자국민들에게도 익히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문자다.
따라서 나이가 든 분들한테 사용하는 경어나 비속어 또는 지방색이 강한 방언들을 제외하면 모르긴 하나 우리말이 외국인들 입장에서도 가장 배우기 쉬운 문자가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의 IT산업의 세계적 첨단현상은 1990년 대 부터 뚜렷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도 우리말의 우수성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어만 해도 자판이 훨씬 더 커야만 할 것이며 표의문자로 약 십만개에 이른다는 개개 문자를 가진 중국어는 과연 그 문제를 어찌 해결하는지 궁금하다. 더하여서 한글은 표음문자로 몇개만 조합하면 모든 발음이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성악가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는 것도 한글이 한몫을 한다고 하는데 복잡한 원음을 한글로 옮겨적은 후 외우고 용이하게 발음을 할 수 있는 것도 한 원인을 제공한다는 어느 저명 성악가의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감지한 몇몇 국가에서 한글을 자신들의 국적어로 삼고자하는 움직임이 있으며 외국의 정상급 가수들이 우리의 가곡을 발음 하나 틀리지 않고 부르는 영상들을 흔히 접하고 있다. 한류의 세계화가 불길처럼 지구촌을 달구고 있는 마당에 우리 글자가 세계의 공용어가 되어 유엔도 한글로 총회를 하는 날을 꿈꾸어 본다. 우리가 그렇게 못난 민족이 아니다. 6/20/2023 /박인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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