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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위의 이슬"

"풀잎 위의 이슬" "We have learned how to make a living but not a life. We've added years to life, not life to years.".....George Carlin (1937-2008, American comedian) '우리는 먹고 사는 일에는 성공했으나 삶의 질을 향상하는데는 실패했으며 수명은 늘렸으나 삶을 증진시키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어느 삼류시인은 인간의 삶을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고마는 나팔꽃에 비유했는가 하면 인간의 삶이 마치 풀잎 위의 이슬같은 존재라고 말한 최초의 사람은 Socrates 다. 밤새 나뭇잎에서 증발한 수분이 숲의 찬공기를 만나 액화한 것이 이파리의 경사진 곳에 모인 것이 이슬이며 해가 뜨면 사라지고마는 단지 몇시간짜리 생명같은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철학자도 느낀 듯하다. 매일 눈을 뜨면 친지들의 부고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우리들의 부모세대에 비해 평균수명이 대략 십년정도 더 늘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으나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는 요즘도 90을 넘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나는 얼마나 살까? 를 답하는 공식이 있으니 85 +, - 의 법칙이다. 건강리스크가 존재하는 경우 길게 보아 80이요 리스크가 없는 경우 90전후를 보는 공식이다. 그럼 나는 몇년이 남았을까? 그간 모진 비바람 태풍 홍수 한발 번개 눈보라 폭설 등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으며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인간도 삶이 허무한 것이라는 것에는 아무도 이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삶에 대한 풍자적이고도 해학적이며 고난도의 지성적인 코미디로 일세를 풍미한 Carlin도 인간의 삶을 보며 설령 삶의 년한은 길어졌으나 과연 그것에 해당하는 삶의 내용도 증가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진시황 당시부터 인간은 불로초를 찾아 헤매고 있으며 그 추세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어 소위 '몸에 좋다'는 물질들에 대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고 있으나 과연 인간이 어찌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혜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별무하다고 하겠다.
인간의 삶이 결코 허무한 것이 아니며 제대로 살면 한번으로 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많은 위인들이 자신을 초월하는 삶을 살기를 권했으며 자신보다 더 오래 갈 것들을 위해 살기를 권한 바 있다. Victoria 시절 유명한 목회자 Charles Spurgeon (1834-1892)은 자신의 이름을 대리석에 새기려하지 말고 인간의 가슴 속에 새기라고 했는데 그의 설교문은 아직도 남아 많은 목회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니 그는 분명히 자신보다 오래 갈 것들을 위해 산 결과라 하겠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직업에 종사하던 타인의 복지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일을 행하며 단지 호구지책으로 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과 내 일을 통해 누군가의 삶이 개선되고 있다고 여기며 사는 두 사람의 삶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하겠으니 전자는 단순노동을 하고 있으나 후자는 소명의식으로 생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 전산망에는 소비자들인 환자들로 부터 도착하는 각종 민원사례등과 모범사례들이 입력되고 있는데 민원건은 법무팀이라는 조직이 있어 해결하지만 모범사례 등은 공지를 함으로써 모든 직원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고 있다. 며칠 전 감사편지가 하나 도착하여 병원 전 직원에게 공개된 바 있다.
대선이 있던 날 밤 코로나 양성환자가 응급제왕절개를 필요로 하는데 아무도 받아주는 병원이 없다는 소식이 동두천으로 부터 왔다. 갈곳 몰라 초조하게 발만 동동구르던 앰불런스의 방향을 돌려 우리병원에서 새벽녘에 모든 수술 종사자들이 우주복을 입고 출산하였는데 사내 아이 이름을 '석렬'이로 지은 사건이 있었다. 보도 듣도 못하던 환자에게 선행을 베풀어준 모든 손길에 감사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자라는 아이를 보며 감사하다는 편지라도 써야 빚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더라는 얘기였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친구도 갸륵한 일이겠으나 의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안타까운 환자는 아프리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이라도 그의 죽음 앞에서 그의 삶이 과연 풀잎 위의 이슬 같지 않았었는가를 물어보라! 나를 초월한 삶! 나보다 더 오래 갈 것들을 위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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