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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살 때 겪은 아빠의 교훈이 ! (이영순 칼럼 2022년 5월호)

4살 때 겪은 아빠의 교훈이 ! (이영순 칼럼 2022년 5월호) 가정의 달을 마지하면서 네 살 때 겪은 아빠의 교훈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가 살던 곳은 함경북도 제일 끝자락에 있는‘서수라’라는 곳, 바로 쏘련. ‘블라디보스토크’와의 접경지역이다. 추운겨울 눈이 내릴 때면 어른들이 이웃과의 통로를 위해 두툼한 옷차림으로 미리 미리 눈을 치우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서 이웃에 갈 때면 어름터널을 통해 가야했던 그 때의 겨울 풍경이 마냥 그리워지곤 한다. 그때가 중일전쟁(일본 강점기) 때이었다. 당시 ‘미나 미나 고로세 짱꼴라!’(전부 다 죽여라 짱꼴라!)라는 중국인을 멸시하는 유행노래가 어린 나에게도 그대로 세뇌되었다. 우리 집 근처 낮은 야산에는 중국인들이 재배하는 채소밭이 있었다. 아침마다 중국인들이 까만 바지와 옆이 터진 긴 옷을 입고 어께에는 저울 모양으로 드리운 두 바구니에 싱싱한 채소를 마치 꽃꽂이 작품처럼 담아 줄줄이 내려오던 모습도 떠오른다.
그런데 어느 따뜻한 봄 날 아희들을 따라 중국인들이 재배하는 채소밭으로 올라갔다. 한 곳에 이르자 예쁜 빨간 무가 머리를 쏙 쏙 내밀고 우리를 반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 아이가 먼저 그 빨간 무를 뽑자 약속이나 한 듯 제각기 몇 개씩 뽑았다. 나는 그것을 움켜잡고 아빠 엄마에게 칭찬 받을 것을 생각하면서 너무나 좋았다. 뒤뚱 뒤뚱 걸어 언덕 아래 집에 이르자 아빠, 엄마! 이것 짱꼴라 것 가져 왔어!” 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칭찬하실 줄 알았던 아빠 엄마는 깜짝 놀라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또 “이것 짱꼴라 거야!, 이것 짱꼴라 거야!” 크게 외쳤다. 그러자 아빠는 “짱꼴라 것 가져와도 남의 것이니 도둑놈이야!” 라고 하셨다. 나는 ‘도둑놈’이란 말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나는 두려워졌다. ‘아니, 짱꼴라 것인데...?’
아빠는 벽에 걸린 큰 벽시계 뒤에서 회초리를 내리시더니 “영순아, 너 잘못했으니 맞아야지?” 하시면서 돌아서게 하시고 종아리를 몇 차례 때리셨다. 나는 아픈 것 보다 ‘도독놈’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순간 내게는 그 평화스럽던 언덕이 두려운 언덕으로 변했다. 아빠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셨지만 나는 ‘도둑놈’ 이란 말 때문에 네 살배기의 어린 양심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주일이 되었다. 언니와 함께 아빠를 따라 산언덕에 있는 주일학교에 갔다. 나는 제일 앞자리 유치반에 앉아 있는 언니 곁에 앉아 헌금으로 가져간 구리돈 1전 짜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동 설교를 하시던 아빠가 “어제 우리 영순이가.” 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때 나는 어제 일을 생각하면서 두 다리 사이에 머리를 틀어박고 말았다. 어린이들은 ‘돌아갑시다. 돌아갑시다.“ 폐회 노래를 부르면서 다 떠났지만 나는 꼼짝하지 못했다. 아빠는 나를 일으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어제 일로 고통하고 있는 나를 위로하셨던 그 품이 지금도 포근하게 느껴진다.
유아기의 교육이 모든 성장 과정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격언에도 ‘세 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는 격언이 있지 않는가. 아기가 출생하고 4살 까지 50%의 지능발달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른과 달리 시각과 청각의 감각을 따라 생각하고 활동하는데 모방의 천재인 어린이들의 잘못된 일들을 무심코 지나친다면 가르쳐야 할 가장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다. 나의 네 살 때의 아버지의 생생한 교훈이 그대로 나의 자녀들에게 적용되었음을 생각하면서 부모님과 함께 했던 그 옛날에 요즘도 푹 빠지곤 한다. 어느 날 아침 나의 손자가 아빠와 함께 맥도날드 봉투를 들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왔다. 손자는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리고서둘러 봉투를 열었다. 그런데 봉투 속에서 두 개의 같은 장난감이 나왔다. 손자는 좋아하면서 이것 하나는 마이클(외사촌)을 주어야지! 라고 했다. 좋아하는 아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아빠가 ”이 사람들이 모르고 두 개를 넣었으니 하나는 맥도날드에 도로 갖다 주어야 한다.“고 말 하자 손자는 고개를 끄떡였다. 조금 후 더 받은 장난감을 손에 들고 맥도날드를 향하는 아들과 손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교육하기에 알 맞는 기회를 포착한 나의 아들이 한층 대견스럽게 여겨졌다.”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곤경하라. 이것이 약속된 첫 계명이니라.“(에베소서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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