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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와 <애 틀 랜 타> 누님 ]

[ 미나리와 <애 틀 랜 타> 누님 ] - 김택근/시인,작가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들의 이야기다. 일가족이 트레일러하우스(이동식 주택)로 이사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작품성을 논하지만 나는 우리 누님과 매형이 생각나서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떠났지만 꿈이 조금씩 작아져 결국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보는 내내 쓸쓸했다. 1975년 초겨울, 누님은 매형을 따라 영화 속 부부보다 일찍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조지아주 애틀랜타였다. 누님은 ‘춥고 슬픈 날’로 기억한다. 한국은 가난한 나라, 미국은 이름대로 아름다운 나라였다. 미제(美製)는 단연 향기로웠다. 누님은 갓 돌이 지난 아기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겼다. 당시 김포국제공항은 늘 눈물에 젖어있었고, 이민을 떠나는 젊은이들은 ‘공항의 이별’ 노랫말처럼 이 땅에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떠났다.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쥐고, 끝내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하늘 멀리 사라져갔다. 누님은 영화 속 가족처럼 바퀴가 달린 트레일러하우스에서 살았다. 날마다 부모와 형제들이 그리웠을 것이다. 두고 온 아기가 보고 싶었을 것이다. 고향 하늘이 어디인지 몰라 머리를 서쪽으로 향한 채 잠을 청했을 것이다. 부부는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고향에 두고 온 것들을 잊기 위해서도 더 열심히 일했을 것이다. 누님은 식구들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고향집에는 전화기가 없어 길 건너 신태인중학교로 전화를 했다. 국제전화란 말에 놀란 교장선생은 허겁지겁 교장실을 나와 철조망 너머 우리 집을 향해 미국 딸이 전화를 했다고 외쳤다. 어머니도 놀라서 뛰쳐나왔다. 교장선생은 학교 정문은 너무 멀다며 철조망에 난 개구멍을 더 넓혀주었다. 국제전화는 감이 멀었다. 어머니는 교장실에서 악을 쓰고 눈물을 쏟았다. 험한 손으로 손녀를 키웠다. 자식들 키울 때는 병원에 얼씬도 안 했지만 손녀는 달랐다. 아프면 한밤중이건 새벽이건 택시를 불러 큰 병원이 있는 정읍으로 달려갔다. “자식이라면 어찌 되든 그냥 키우지만 손자는 참말로 조심스럽네.” 손녀가 어디서 맞고 오거나 얼굴에 손톱자국이라도 나 있으면 그날은 마을이 뒤집어졌다.
매형과 누님은 때때로 돈을 부쳐왔다. 미국에서 오는 편지봉투는 크고 빳빳했다. 그 안에 편지와 함께 수표(우편환)가 들어있었다. 어머니는 수표를 한동안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우체국에 가져가 환전을 했다. 그 돈은 보기도 아깝고, 쓸 때는 더 아까웠다. 몇 푼은 아껴서 이웃들에게 막걸리를 대접했다. 사람들이 고맙다고 말하면 딸이 사는 술이라며 웃었다. 손녀는 할머니 품에서 별 탈없이 자랐다. 야위고 등이 굽은 마을에서 손녀의 웃음은 희고 맑아 잡귀신을 몰아냈다. 하지만 이별은 예고돼 있었다. 누님이 한국에 나와 일곱 살 딸을 데려갔다. 공항에서 작은 배낭을 멘 손녀가 인사를 했다.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손녀는 그렇게 하늘 멀리 사라졌다. 할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참말로 못 먹여서 미안하다. 미국서는 잘 먹고 잘 크거라.” 미국으로 간 손녀는 대학을 나와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어느 날 결혼 소식을 전해왔다. 식구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애틀랜타로 날아갔다. 신랑은 미소가 큼지막한 중국 청년이었다. 미국식 결혼식은 오래 걸렸다. 야외 결혼식을 치르고 이어서 실내 파티가 벌어졌다. 손녀는 맨 먼저 할머니에게 다가가 춤을 청했다. 한국에서 온 자그마한 할머니, 파티에서 유일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동양인. 둘은 오래 춤을 췄다. 하객 모두가 할머니와 손녀를 에워싸고 박수를 쳤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쳤다. 왜 자꾸 눈물이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영화 속의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미나리는 어디에 있어도 알아서 잘 자라지.” 어디에 있든 잘 살아보자는 다짐처럼 들렸다. 매형과 누님도 오래전에 큰 집을 마련하고 슈퍼마켓도 샀다. 둘째 딸은 약사로 일하고 있다. 노년생활은 풍족한 편이다. 그럼에도 누님은 여전히 한국말을 하고, 한국 드라마를 보며, 미국 속의 한국에 살고 있다. 가난한 나라의 입을 줄여준 사람들. 슬퍼할 겨를도 없던 사람들. 가난을 벗어났어도 여전히 허전한 사람들. 모국의 무관심에도 한국만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리고 서서히 잊혀져가는 사람들. 이제 누가 저들을 기억할 것인가. 삼가 치열한 삶에 두 손을 모은다. ( 김 택 근 / 시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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