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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노(Charles Francois Gounod)의 'Ave Maria'

♭♪♬◐音樂感想◑♭♬♪ 오늘은 구노(Gounod)가 어떤 作曲家이며 친구를 爲해 작곡한 [Ave Maria] 는 이 曲에는 절절한 친구의 友情이 들어 있습니다. 💒♬♪ 구노(Charles Francois Gounod)의 'Ave Maria' - 어린 구노는 음악 신동이라 불렸습니다. 빠리 외방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는데, 같은 학급에는 구노가 따라잡을 수 없을 소위 ’음악 천재’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였고 선의의 경쟁자였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친구가 음악을 하리라고 생각했던 구노는 신학교에 들어간 친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에 그 친구 소식도 묻어 왔습니다. 사제가 된 그 친구가 빠리 외방 선교회에 들어갔다고... 구노는 그 친구를 만나보고 싶었는데 어느새 중국으로 발령받아 갔다는 소식만 접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구노는 그 친구를 위해 틈틈이 기도를 했습니다. 오랜 사목 후에 휴가라도 오면 옛 추억을 나누며 차를 함께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어쩌면 자신이 그 친구가 있는 중국에 가서 동양 문물도 구경하며 그 친구가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가끔씩 학교 게시판에는 붉은 글씨로 'xxx 순교' 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볼때마다 평화 속에서 주님을 믿는 순박한 사람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습니다. 구노도 물론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슬프고 가슴 아파했고 그 친구를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선교의 자유가 주어진 중국이기에 내심 안도했습니다. 어느날 이었습니다. 게시판에 그 친구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빨간 글씨는 아니어서 안심을 했지만 내용을 읽어본 구노는 경악스러웠습니다. 그 친구가 '조선 대교구 주교'로 임명되어 죽음의 땅 '조선'으로 발령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구노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기 힘들다는,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는, 차라리 순교하기 위해서 조선으로 들어간다는 말까지 횡횡했던 바로 그 '죽음만이 기다리는' 조선으로 들어간답니다. 구노는 날마다 주님과 성모님께 그 친구가 제발 무사히 돌아와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주일날이었습니다. 구노는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삼종시간도 아닌데 이렇게 요란하게 종이 울린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의례 그랬듯이 순교자가 또 나온 것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달음질 쳐서 뛰어간 구노는 실신지경이 되었습니다. 게시판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엥베르 주교 조선에서 순교' 눈물이 앞을 가려 서 있을 수 조차 없던 구노는 정신없이 뒷동산으로 뛰어갔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자비로운 눈길로 우리를 내려다 보시는 성모상앞에서 구노는 목놓아 울며 성모송을 바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Ave Maria'는 성모송입니다. 그렇게 친구이자 조선의 주교이자 순교자이며 후일 영광스러운 성인의 관을 쓰신 성 엥베르 주교를 기리며 만들어진 노래가 '구노의 아베마리아'입니다. 구노(Charles Francois Gounod)는 19세기 프랑스의 대작곡가입니다. 아버지는 유명한 화가이며 어머니는 피아노를 잘치는 예술적 환경에서 자라난 그는 한때 사제가 되려한 열심한 신자였습니다. 1841년에는 미사곡을 로마에서 초연하였으며, 레퀴엠 등의 종교곡을 작곡하였고, 1851년 "사포"를 작곡, 1859년 "파우스트"로 대성공하고, 1867년 "로미오와 줄리엣"을 작곡하는등 사회적 명성을 얻었으나, 1855년 성녀 세실리아 장엄미사를 작곡하고는 세속적 명성을 버리고 종교 음악에 전념하게 됩니다. 빠리외방전교회 성가대장이었을 때, 당시 조선에서 전교하던 빠리외방전교회의 사제였던 친구의 순교 소식에, 영감을 받고 즉흥적으로 성가를 작곡하였는데, 이 곡이 바로 구노의 아베 마리아인 것입니다. 이 성가는 조선교회와 순교자를 위한 성가입니다. 우리나라를 위한 구노의 단 하나의 성가입니다. 오늘은 세계적인 테너가수 Luciano Pavarotti 의 노래로 들어보겠습니다. https://youtu.be/570GMKGry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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