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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 후보를 위해

노벨 문학상 후보를 위해,, 루이즈 글릭이 올해 노벨문학상을 탄것은 예일대 캠퍼스같은 인간 본성에 대한 poetic intuition이 자유로운 곳들을 거치며 시를 다듬어 갈수 있었겠다 생각합니다. 꼭 60년대의 우리  문리대 캠퍼스같이 어떤 어린 시인이    허름한 외투에 손포켓 찔러넣고 찬바람 겨울에도 웃던 그곳  Louise가 Keats에게서 내면의 소리 듣기를 터득하고;  Rilke처럼 속을 보는 통찰력 키두며; Eliot의 정확한 언어선택으로; 이들이 Louise 속에서 이 땅위에 - 또렷이 -  낮은소리로 삶에 대해 말해 주는대 - 그중에도 -   "이별 과 절망"에 대해 그녀의 시는 - 단호히 -    Snowdrops가 피는 땅이거나  그 꽃이 필수도 없는 다른 모든 땅에 - 사는 -  수많은 사람들에게 - 삶의 이유 -  그것을 - 찾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이미 소중한 친구가 많은것 - 그것도 -  삶의 joy와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Do you know what I was, how I lived? You know what despair is; then winter should have meaning for you. I did not expect to survive, earth suppressing me. I didn’t expect to waken again, to feel in damp earth my body able to respond again, remembering after so long how to open again in the cold light of earliest spring– afraid, yes, but among you again crying yes risk joy in the raw wind of the new world. (Nobel committee가 수상자 발표에 왜 요런 Arial 문자를 썼을가요 . . .) 올해 202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 여성시인 Louise Glück(1943~ ) 의  작품중 유일하게 한국어로도 번역된 시 Snowdrops 입니다. 암울하고 습한 겨울을 견디고 봄이 되면 가장 먼저 생명을 틔우는 꽃 - 그 꽃을 발견한 시인의 눈매가 매섭습니다. 류시화 시인은  최근에 출판된 [마음 챙김의 시]라는 시집에서 이 섬세한 시를 번역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눈풀꽃] - 루이즈 글릭  (류시화 옮김)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Snowdrops  - Louise Glück Do you know what I was, how I lived? You know what despair is; then winter should have meaning for you. I did not expect to survive, earth suppressing me. I didn't expect to waken again, to feel in damp earth my body able to respond again, remembering after so long how to open again in the cold light of earliest spring-- afraid, yes, but among you again crying yes risk joy in the raw wind of the new world. '눈풀꽃'은 가장 이른 봄 땅속 구근에서 피어 올라오는 작고 흰 꽃. 설강화(雪降花) 혹은 영어로 스노우드롭(Snowdrop)이라 불린다.  눈 내린 땅에서 꽃을 피우는 특성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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