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씻기와 사랑
2019-12-23 (월) 성이호성 국제기구 개발담당
날이 추워지니 신체 다른 부위에 비해 발에 땀이 더 집중적으로 나는 느낌이다.
미국 집들은 한국과 달리 온돌식의 난방 시스템이 아니어서 겨울에는 바닥이 더욱 차다.
집에서 양말이나 슬리퍼를 신고 다니다보니 발에 땀이 더 차는 것 같다.
어린 시절 직장에서 귀가한 아빠가 잠자리에 드시기 전
샤워는 안해도 발은 꼭 닦고 주무시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내가 긴 하루를 보내고 잠들기 전 발을 씻고 안 씻는 것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아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손에 비해 상대적으로 씻기가 어려운 발을 씻었을 때 오는
심리적인 상쾌함은 표현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크고, 개운해서 각성효과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발은커녕 세수나 양치를 하기도 너무 피곤한 날들이 많아,
집에 오면 바로 침대 위로 뻗고 씻는 것을 다음날 아침으로 미루는 날들도 꽤 된다.
그래서 때로는 이렇게 지쳐 씻지도 못한 상태로 잠들기 전,
누군가 내 발만이라도 씻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여자친구와 저녁식사 후 살짝 언쟁 아닌 언쟁을 했다.
여자친구가 회사업무와 공동체에서 맡은 일들까지 다 챙기느라
피곤한 상황에 내가 눈치 없게도 더 맥이 빠지는 이야기를 한 게 화근이었다.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지쳐 보이는
여자친구의 기분을 어떻게 전환시켜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다,
내가 발을 씻어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조금 전까지 나에 대한 섭섭함을 표현하던 여자친구는
내 제안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살짝 당황했다.
우선 여자친구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발을 씻어준 적이
있을 뿐 아무도 발을 씻어준 적이 없어서 주저했다.
하지만 조금 더 현실적인 주저함은 발에서 혹시라도
냄새가 나지는 않을지 민망해서 선뜻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했다.
여자친구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6년 전 뉴멕시코 주 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에 선교봉사를 갔을 때
생면부지인 그 동네 청소년 친구들의 발을 씻어준 경험을 나누고 난 이후였다.
사실 당시 나는 확실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간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인디언 보호구역의 삶에 대한 호기심에 몸담고 있던
뉴욕 공동체를 따라갔었다. 그 선교여행 프로그램 중 세족식이 있었다.
문화권을 막론한 청소년들 특유의 사춘기 반발심으로 나바호 친구들은
선교를 온 우리의 말도 잘 듣지 않고, 다른 선교 프로그램에도 전혀 흥미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족식을 진행할 때 그 친구들이 얼마나 진지했는지,
그리고 세족식 이후 그 친구들이 뉴욕에서 온 우리를
바라보는 표정과 행동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우리의 사랑을
그 친구들에게 직접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혼자서 발을 씻는 것은 청결을 위한 행위라면,
상대방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말이 되니 주변에서 선물들과 편지를 많이 주고받는다.
아직 딱히 좋은 선물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연말연시를 맞아
가족 혹은 연인에게 ‘발 씻기’ 선물을 권해본다. 발 씻기로 마음을, 사랑을 전해 볼 것을 권한다.
<성이호성 국제기구 개발담당> /THE KOREA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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