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감사의 자세"


“Happy Thanksgiving Day To You
And Your Family..!”

사랑의 주님과
감사가 넘치시는 추수감사절 보내시며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In Christ Love,
블로그지기 드림..

"감사의 자세"

2019-11-16 (토) 이정근 성결교회 목사


1970년대 초 켄터키에 있는
에즈베리 신학대학원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700명 내외의 학생들이 목사,
교수, 선교사로 부름 받고 신학수업,
인격도야, 지도력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학교였다.

백인에다 남학생들이 주류였지만
여학생과 흑인학생들도 꽤 있었다.
아시안은 소수였다. 한국, 일본,
중국, 인도 학생이 각각 두세 명씩이었다.

그 가운데 아메리칸 인디언
곧 미국 원주민 출신이 한명 있었다.
생긴 모습이 우리 한국인과 비슷해서 쉽게 친해졌다.
그는 만나기만 하면 미국 백인들 비판에 열을 올렸다.
그 백인들이 “겉은 양처럼 순한 것 같지만
속은 약탈에만 몰두하는 이리”라는 것이다.
자기네 원주민을 죽이고, 약탈하고, 쫓아내고,
학대했던 사실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얼굴도 적개심으로 가득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추수감사절 이야기였다.
메이플라워 배를 타고 플리머스에 상륙했다는
‘필그림 조상들’이 인디언 90명을 초청하여 함께
추수감사절 행사를 했다는 이야기는
백인들의 자기정당화를 위한 조작일 뿐이란다.
자기들 조상이 그때 칠면조를 가지고 와서
함께 축제를 했다는 이야기도 날조된 것이라 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1789년에 제정 선포한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중인
1863년에 연방공휴일로 선포했다.
링컨에 대하여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배웠는데
지금도 세종대왕과 함께 필자의 최대영웅이다.
온갖 가난과 고통을 무릅쓰고 마침내
미국 16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인물 아닌가.
고등학교 영어교과서에 있는
게티즈버그 연설문을 아예 통째로 외울 정도였고,
그 유명한 전사자 묘지에 가서도 소리 높여 읽었다.

물론 켄터키에 있는 그가 살았던 두 통나무집도 방문했다.
방이 하나밖에 없는 맨흙바닥 집이었다.
링컨의 중요한 유품들이 전시된 진열관에는 목사인
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성경이었다.
두툼하고 낡은 성경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란다.
링컨은 그 성경에서 필경,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구절을 읽고 외웠을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감사절을 미국연방공휴일로 선포하게 했으리라.

우리 한국도 추수감사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바로 추석이다.
그래서 교회지도자들 가운데 11월 마지막 주일보다는
음력 8월 보름인 추석을
감사주일로 지키는 것이 좋겠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어떻거나 감사의 정신을 체득하고 인격화한다는 것은
문명인의 필수조건임을 깊이깊이 명심해야 한다.

감사생활에는 몇 단계가 있다.

우선 간절히 소원하던 일이 이루어졌거나
특별한 행운을 만났다면 물론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도와주었던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꼭 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다.
감사하다는 말에 인색한 것은 인간된 도리가 아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한다.

작은 일들에도 감사해야 한다.
얼굴에 있는 작은 티를 알려준 사람,
버스를 먼저 타라고 양보한 사람,
길을 가르쳐 준 사람,
자리나 차례를 양보해준 이들에게
진심어린 음성으로 감사인사를 꼭 해야 한다.

그러나 더 어려운 감사가 있다.

자신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쳤거나
큰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에게 어려움을 준 남편의 영혼구원을 위해
눈물로 기도함으로써 끝내는 남편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자녀들도 모범적으로 길러낸 어떤 엄마가 있었다.
‘십자가를 지고 드리는 피멍든 감사’였다.

<이정근 성결교회 목사>
/KOREAN DAILY NEWS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어느 선술집 벽에 있는 낙서/일본

일본에 주재원으로 23년 살다온 친구가 12월 초에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가 어느 선술집 벽에 있는 낙서를 사진으로 찍어서 번역해준 건데 웃기면서도 의미가 심장합니다.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두 줄 읽고 웃고, 두 줄 읽고 무릎 치고... 와, 뭔가 조금은 통달한 '꾼'이 끄적거린 거 같습니다.  사랑에 빠(溺)지는 18세  욕탕서 빠(溺)지는 81세  도로를 폭주하는 18세  도로를 역주행하는 81세  마음이 연약한 18세  온뼈가 연약한  81세  두근거림 안멈추는 18세  심장질환 안멈추는 81세  사랑에 숨막히는 18세  떡먹다 숨막히는 81세  수능점수 걱정하는 18세  '혈당/압'치 걱정의 81세 아직 아무것 모르는 18세 벌써 아무것 기억無 81세  자기를 찾겠다는 18세  모두가 자기를 찾고 있는  81세. ———-!———!—— 몸에좋고 인생에 좋은 피자 열판 보내드립니다.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허리피자 가슴피자 어깨피자 얼굴피자 팔다리피자 주름살피자 내형편피자 내인생피자 내팔자피자 웃음꽃피자 오늘부턴 신년까지 늘 웃음과 행복한 일만 가득하세요.**

🌶 고 추 장  🌶

🌶 고 추 장  🌶 고추장에 관해서 특별한 체험이 있다. 뜻하지 않게 갈비뼈가 부러져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의 일이다. 한개도 아니고 열개씩이나 골절되어 꼼짝달싹을 못하고 아편으로 통증을 겨우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혈압이 올라가고 혈당이 올라가 혼수지경에 이르니 보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내도 어떻해서든지 날 살려보려고  정성을 다해 음식을 해왔지만 모두가  헛수고일 뿐이었다. 나 또한 집사람을  혼자 살게 만들면 천벌을 받겠기에 열심히 음식을 먹으려 애를 썼지만 구역질만 더 할 뿐이었다. 여행다닐 때 고추장 단지를 꾀차고 다니며 햄버거에 발라먹던 생각이 나서 고추장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고추장을 죽에 넣어 먹으니 신통하게 잘 넘어가는데 그 맛 또한 기가막혀 부글거리는 뱃속까지 편안해졌다. 덕분에 문병오는 사람마다 고추장 단지를 가져오는 바람에  고추장 벼락을 맞을 지경이 되었다. 그 후로는 고추장 단지가 내 식탁에 주인이 되었다.   고추장에 무슨 성분이 들어 있고 무슨  작용을 하는지는 몰라도 신통하기 짝이 없었다. 소태 같던 입맛이 꿀맛이요,  구역질도 잠잠해지고 느글거리던  뱃속까지 고분고분 고추장말을 잘 들으니 과연 고추장의 위력이 대단하다. 내 미국 친구들이 겨울만 되면 단골처럼 감기로 골골대고 있을 때 나는 감기가  뭔지도 모르고 지내고 있다.  그들이 날보고 너는 어떻게 감기 한 번 안걸리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내가  건강한 것은 김치 파워야.  너희들도 김치를 먹어라." 하고  자랑을 했는데 이제는 고추장의 효능이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어린 아기를 달랠 때 호랑이 나온다 하면 뚝 그치고, 순사 온다 하면 뚝 그치듯이 뱃속이 앙탈을 부리면 고추장 먹는다  하면 조용해 질 것 같다.  고추는 남미와 아프리카가 원산지란다. 고추의 매운 맛은 알카로이드의 일종인 캡사이신 때문이란다. 이 캡사이신이  자극을 주어 발효작용을 해서 감기 열을 내리기도 하고 위도 자극해서 위액 분비를 촉진해...

우리 아버지 마음 (실 화 (實話))

우리 아버지 마음 (실 화 (實話)) " 헤아릴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 !"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첩첩산중에 상당히 가난한 곳이다.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가정 형편도 안 되고 머리도 안 되는 나를 대도시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나는 대구 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정말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에서 나의 석차는 68/68, 68명 중에 꼴찌를 했다. 지독하게 부끄러운 성적표를 들고 고향으로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표를 부모님께 내밀 자신이 없었다. 무학의 한을 자식을 통해서 풀고자 했는데, 맨 꼴찌라니...! 끼니도 제대로 못 잇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부모님을 떠올리면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 지우개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 1등으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 드렸다. 아버지는 초등 학교도 못다닌 무학이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말했다. "찬석이가 공부를 잘했더나 ? 아버지가 말했다. "앞으로 두고 봐야제, 이번에는 우짜다가 1등을 했는가배...!" "아들 하나는 잘 뒀구먼, 1등을 했으면 잔치를 해야제!" 그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 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 뿐인 우리집 돼지를 잡아 동네사람들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 집 재산목록 제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부지 ~ !"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서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쥐어 박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