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화가 이중섭
화가 이중섭(李仲燮)은 1956년 9월 6일 적십자 병원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40년 짧은 생애였다.
그의 시신은 무연고자로 처리돼 사흘간 방치됐다.
시인 김광균은 "뒤늦게 소식듣고 갔더니 영안실엔 주머니에 1원 한장 없는 화가들이 웅성거리며 장례 치를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화가 박고석은 화장터에서 "좋은 그림만 남기고 가면 그만인가. 너같이 저만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려는 놈은 죽어 마땅해"라며 울부짖었다.
이중섭의 유해는 망우리에 묻혔다.
시인 구상(具常)은 "천사가 잠시 내려왔다 돌아갔다고 생각하자"고 했다.
그로부터 30년 뒤인 1986년 8월 김광균 박고석 구상 등은 이중섭을 기리기 위한 미술상을 제정하기로 뜻을 모았다.
한묵 남관 이대원 권옥연 김병기 전혁림 장리석 등 친구·후배 화가 24명이 미술상 재원 마련을 위해 작품 한 점씩을 내놓았다.
미술계에선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30년, 서울 정동 조선일보사 미술관에서 '이중섭 미술상 30년'을 기념하는 역대 수상 작가 작품전(5월 4~13일)이 열리고 있다.
1회 황용엽부터 올해 김을에 이르기까지 수상 작가들 작품을 한자리에 모으니 전시장이 훤하다.
연휴 중에도 관람객들 발길이 이어졌다.
전시장 한 곳에 이중섭이 쓰던 빛바랜 나무 팔레트가 하나 놓여 있다.
서양화가 신양섭씨가 애지중지하다가 기증한 것이다.
수상 작가들은 서양화와 동양화, 조각, 섬유미술, 디지털, 사진의 장르 구별이 없다.
순수와 민중미술, 구상과 비구상의 벽도 간단히 뛰어넘는다.
학연·유파에다 친소관계가 강한 미술계에서 하나의 미술상이 30여 년 흔들리지 않고 권위를 유지해 온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공정하게 심사하려는 노력, 예술을 이해하는 열린 자세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
1954년 이중섭 그림이 저 유명한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때 이중섭의 첫마디가 "내 그림이 비행기 타겠네"였다고 한다.
그에게는 이런 천진난만함과 함께 창조자로서의 오 만한 긍지가 있었다.
그는 잔꾀나 타협을 외면하고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었다.
어떤 때는 "내 그림은 모두 가짜"라며 아궁이에 넣기도 했다.
불행과 고뇌로 점철된 인생이 죽어서 잊히지 않고 오히려 경의(敬意)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예술의 역사만이 줄 수 있는 보답일 것이다.
이중섭미술상 30주년 기념전에서 살아 있는 이중섭을 보았다.
2018. 5. 8. 조선일보
[만물상] 김태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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