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남자, 착한 여자 ..!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악한 사람들이 복을 누리는
것 같은 모습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한탄하고,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 있
는 게 맞냐고 절규합니다.
그래 처음에는 착하게 살다가도,
마침내 착하게 사는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착하게 산 결과가 손해와 고통뿐이라면,
착하게 사는 것이 무슨 가치를
지니겠느냐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의 옆집에는 한 쪽 팔이
없는 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소녀가 학교에 가는 시간이면,
그 아이는 언제나 옥상에 올라가
소녀의 집 앞마당을 내려다보거나,
등교길에 재잘대는 아이들을 구경하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말이라도 걸라치면,
그 앤 금방 모습을 감췄습니다.
어느 날 옥상 위의 아이를 발견한
소녀가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저 앤 팔이 없대요. 그래서
학교도 못 다니고 집에만 있는 거래요.”
“저런, 딱하구나.” 그 날 저녁이었습니다.
아빠가 갑자기 창고에 버려 둔 낡은
책상을 들어 내 부러진 다리를 붙이고,
마당 한가운데에 전깃줄을 연결해
전등까지 켜는 것이었습니다.
“자, 오늘부터 여기서 공부하자.
이제 아빠가 우리 공주님 과외선생님이다.”
소녀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아빠가 만든 뜨락 교실의 학생이 되었습니다.
“자, 오늘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큰소리로 읽어 보거라.”
그 날부터 소녀는 눈이 오거나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한 시간씩
교과서를 읽고 동화책도 읽었습니다.
아빠가 그 별난 야간수업을 그만 둔 건,
옆집 아이가 이사를 가던 날이었습니다.
퇴근길에 이삿짐 트럭을 본 아빠가 물었습니다.
“옆집 아이 이사 가니?” “네” “그래.
다른 데 가서도 공부를 계속 하면 좋을 텐데”
소녀는 아빠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옆집 아이의 이사에 왜 그리도
깊은 관심을 보이는지 궁금했지만,
아빠는 끝내 말을 아끼셨습니다.
소녀가 아빠의 그 깊은 뜻을 알게
된 건, 세월이 한참 흐른 뒤였습니다.
어느 날 소포 하나가 집으로 배달됐습니다.
알 수 없는 이름, 알 수 없는 주소,
아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포를 뜯었습니다.
그 속에는 동화책 한 권과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습니다.
“20년 전 옆집에 살았던
외팔이 소녀를 기억하시는지요?
그 때 따님에게 읽어 주시던 동화가
얼마나 재미있던지, 날마다
옥상에서 도둑수업을 받았답니다.”
그 도둑수업으로 희망을 얻어,
이사 후 검정고시를 치고
대학까지 마친 뒤, 얼마 전 동화작가가
되었다는 외팔이 소녀의 편지였습니다.
아빠는 그 날 밤 배달된 한 권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밤을 지새우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
소개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화인 것이죠.
세상이 각박한 것 같아도,
이야기 속의 아빠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입니다.
아빠가 그리도 고운
마음을 펼쳐 보였는데,
옆집 외팔이 소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면,
그 아이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착하게 사는
힘을 차츰 잃어갈 겁니다.
그런데 아빠의 그 고운 마음이
이런 아름다운열매를 맺는 걸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계시고,
적당한 때에 착한 행동에
대한 열매를 맺어주십니다.
그래 우리는 소망을 잃지 않게 됩니다.
비록 악하게 사는 사람들이 복을 누리는
모습이 주변에 널려 있다 하더라도,
착하게 사는 길을 걷는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착함에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악하게 행동하면
금방 100% 큰 손해를 입고,
착하게 행동하면
금방 100% 복을 누린다면,
세상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누가 감히 악하게
행동하겠습니까?
누군들 착한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착함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직 이릅니다.
왜냐하면 그건 기계적인 착함이요,
수동적인 착함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메마른
가슴에서도 가능한 착함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악한 행동을 하고서도 복은
누리는 듯한 모습이 많은 데,
그런데도 착한 길을 걷는 것이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착하게 행동해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 같은 분위긴 데도
착하게 행동할 때, 그런 착함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악이 이토록 판을 칠 수
있냐는 물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이러한 진정한 착함을
기다리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악은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처럼,
하나님은 악을 세상에
허용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악은 진정한 착함을 골라내기 위한
배경이 되는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인간에게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 하나님은 가장 적당한 때에,
끝내는 착한 행동에
대한 열매를 맺어주십니다.
그래 아슬아슬하게
착한 길을 걷게끔
인도하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세상 운영
방식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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