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자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 전도활동 중 평소처럼 어느 날 호숫가에 앉아 몰려든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날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는데,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 그리고 “누룩 비유”(마 13장).
그런데 “비유(parable)”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나 그것을 곰곰이 씹으면 씹을수록 안에 숨겨 있는 진리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도 표면상으론 무리가 듣고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의 비유를 단순히 재미난 이야기로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 안에는 실로 놀라운 천국에 관한 복된 소식이 담겨 있었습니다. 영생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신비로운 지혜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들을 귀가 열렸던 소수의 사람들,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비유를 듣고서 안에 담긴 교훈을 알고 싶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궁금히 여긴 것은 “왜 무리에게 예수께서 굳이 비유로만 말씀하시나?”였습니다. 그 궁금증에 예수께서 이런 화답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1, 12). 더 나아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예수께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 13:14, 15). 예수께서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쉽게 설명하면, 무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 자들은 2,000년 전 유대인들만이 아닌 오늘날 우리에게서도 편협적 수용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 주관(主觀)에서 묶인 채 주변 사람들을 보고 판단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고 들으니 서로 간에 쉽게 오해가 생깁니다. 오해는 자기 자신이 했으면서 괜히 남을 탓합니다. 결국 가뭄에 메말라 갈라진 논처럼 서로간의 관계가 쫙쫙 갈라져 있습니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스킨 인 데 게임(Skin in the Games)란 책에 “비트겐슈타인의 자”란 표현이 있는데, 이 질문과 함께 소개됩니다. “탁자를 자로 재는 행위, 그게 탁자의 길이를 재는 행위일까? 아니면 자의 길이를 재는 행위일까?”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듣기보단 있는 그대로 보고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해가 사라집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는 것이 인간세상입니다. 나와 너가 서로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과 다르다고 함께 하길 거부하기보단 힘들긴 해도 자기 중심적 사고를 내려놓고 각자의 다름을 솔직히 인정하며 애써 손잡고 걸어가야 할 여정입니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면서 손을 뿌리치진 맙시다.
/Sang Ho Yi P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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