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이 주는 의미는?
사람은 누구나 환란을 당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면서 환란을 주는 이에게 원망을 하곤 한다.
어느 누구도 환란을 즐겨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환란은 우리에게 너무나
슬프게 하는 요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환란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무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한다.
천국을 향해 나가는 진리를
하나님의 짐을 운반하는 상태를 말한다.
히브리어의 알파벳 중에 기멜 l이라는 단어는
낙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진리를 배워서 실어 나르고 보답하는 철자다.
좀 더 진보된 생각을 한다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상황이
환난이라는 의미를 갖게 한다.
마태복음 7장 14절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은 협착 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는 말씀에 "좁고" 라는 단어인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에 많이 모여 에워싸여져 좁아진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길 자체가 좁은 상태를 의미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전진할 수 없는 상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라. 이것을 환난이라는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환난이란 단어를 살펴본 결과 천국의 문을 향해 가는 길이 많이 문질러져 닳아버려 흔적이 없어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을 잘 몰라 자기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짐승을 비유하고 있다.
환난은 하나님의 양식이 없는 상태가 되면 자기의 영혼이라도 갉아먹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성경을 삐딱하게 보는 친구들은 세상에 돌발적인 환경의 변화나 전쟁이나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종말이다. 환난이다라고 하면서 세상의 종말을 선포한다.
물론 그러한 환난이 환난 측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환난이라고 분류할 수 있지만 하나님 족에서 보는 환난은 내 안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해 버릴 그때부터
환란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 안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없다고 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고아의 차원이다. 그리고 남편이나 신랑이 없다고 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과부라고 구분하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격려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며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고 야고보서 1장 27절에 언급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환난을 주시는 이유가 성경 속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이 요동치 않게 하시려고(살전 3:3) 경건하게 생활하게 하시려고(딤후 3:12)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살후 1:5) 영광을 받기 위하여(롬 8:17)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환난은 이 땅에서 남들과 다를 바 없이 받는 환난도 있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받을 수 없는 환난을 받게 된다.
그렇게 받은 분들이 환난을 당하는 분들을 찾아 위로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신다. 환난을 천국으로 가는 길에 하나의 관문에 불과한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고자 몸부림친 신앙의 영웅이었다. 자신의 몸에 환난의 흔적을 평생 갖고 살면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것처럼 환난을 주신 것에 감사하자.
환난이 다가온다고 시련이 내게 온다고 뒤로 물러서지 말고 담대하세요.
환난에 넘어서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는 분을 만나세요.
그 분의 손을 잡으세요. 아니 이미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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