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예수 안에 와 있었는데 예수 자신은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파괴된 세 상속에 나타났을 때에 여기에서 죄는 사죄로 변하게 되고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고 대립은 평화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비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 부활은 하나님 안에 있는 참 해방이 죽음을 정복해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부활절을 지키기 위해서 나온 우리들이 알아야 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까?
기독교는 거듭남이 생명입니다. 거듭나지 않고 행하는 어떤 종교적 행위도 이방종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거듭남의 분명한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새 천년 처음으로 맞는 부활절이 갖는 의미가 자못 큽니다.
세상은 급속도로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급변하고 있습니다.생명이 없는 세상과 그에 속한 기관들도 새로운 시대에 거듭나려는 몸부림을 하고 있는데 가장 변하지 않고 제자리 걸음하는 곳이 교회와 정치라고 하며, 구시대적 발상으로 시대의 변화에 가장 둔감하여 새로운 세계의 장애물이라고 세상은 교회를 혹평하기도 합니다. 새 천년의 처음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진정한 부활이 될 수 있도록 새롭게 거듭나는 자아와 교회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패자가 아니라
승자가 되어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디아스포라 유태 경전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승자는 행동으로 말을 증명하고
패자는 말로 행위를 변명한다.
승자는 책임지는 태도로 살며
패자는 약속을 남발한다.승자는 실수했을 때.. “
내가 잘못했다” 고 말하는데
패자는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고 원망한다.
승자는 입에 솔직이 가득하고 패자는 핑계가 가득하다.
승자는 어린아이에게도 사과할 수 있고
패자는 노인에게도 고개를 못 숙인다.
승자는 넘어지면 일어나
앞을 보고 패자는 일어나 뒤를 본다.
승자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열심히 쉰다.
승자는 시간을 관리하며 살고
패자는 시간에 끌려 산다.
승자는 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나
패자는 이기는 것도 은근히 염려한다.
승자는 과정을 위해 살고
패자는 결과를 위해 산다.
승자는 넘어지면 일어서는 쾌감을 알며
패자는 넘어지면 재수를 한탄한다.
승자는 눈을 밟아 길을 만들고
패자는 눈 녹기를 기다린다.
승자는 무대 위로 올라가고
패자는 관객석으로 내려간다.
승자는 돈을 다스리고 패자는 돈에 지배된다.
승자는 차라리 용감한 죄인이 되고
패자는 차라리 비겁한 선인이 된다.
승자는 새벽을 깨우고
패자는 새벽을 기다린다.
“부활의 아침을 위하여...”
주님이 그렇게 떠나가신 언덕너머에도
노랗고 붉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겠지요.
그 황량했던 언덕에
다시 꽃들이 뒤덮일 때면
주님의 고귀한 사랑과 희생,
그리고 부활을 묵상합니다.
삶의 무게가 너무 힘들어
주저앉고 싶은 이들을 위하여,
세상이 위로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이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형체도 알 수 없는 초라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고난의 언덕을 넘으면
영광스런 부활의 아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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