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또 다른 계절을 맞으며



또 다른 계절을 맞으며



2016-08-27 (토) 한수민 국제 로타리 근무

이곳 시카고는 한국의 날씨와 비슷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이 있고 계절에 따른 기온의 변화도 비슷하다. 시카고에서 맞이한 첫 해 겨울은 추위가 유난히도 혹독했는데, 그 때 한 어르신은 “고향인 신의주 날씨가 꼭 이랬다”며 아련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여름의 끝물인 요즈음, 밤이면 풀벌레 소리가 한창이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기운도 느껴지는데, 나는 바로 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때가 가장 싫다.

내 기억에 어렸을 때도 그랬던 것 같은데, 그 때는 이유가 좀 달랐다. 그 때는 이 무렵에 밀린 방학숙제가 슬슬 걱정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일기를 쓰는 게 문제였는데, 지난 날의 날씨가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났기 때문이다(그 당시에는 일기에 ‘맑음’‘흐림’ 이런 식으로 꼭 날씨를 표시해야 했다). 언젠가, 그 때도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가 “선생님도 날씨를 일일이 기억을 못하시지 않을까?”하는 영특한(?) 생각이 들면서 나름 안심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요즘은 그 이유가 달라졌다. 가을이 오면 머잖아 그 길고 음울한 겨울이 오리라는 생각, 갑자기 폭설이라도 내리면 엉금엉금 기어가듯 운전해야 할 생각에 진저리가 처지지만, 그런 현실적인 이유보다는 오히려 “올 한 해도 또 이렇게 가버리는가? 이렇게 정신없이 한 해, 두 해를 보내다 보면 내 인생의 겨울도 금방 오지 않겠는가?”하는 불안하고 초조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며칠 전, 집에서 키우던 애완견을 하늘나라로 보냈다. 그 녀석의 나이가 열여섯, 네 살 때 쉘터에서 입양해서 열 두 해를 우리집에 살았다. 사람으로 치면 백열두살이라니 천수를 누리고도 남은 나이다.

미 리 전제를 하자면 나는 지극한 동물 애호가는 못된다. 그 녀석을 입양한 것도 강아지를 좋아해서 라기보다는 외동아이를 키우는 데에 좋다는 친지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고 “개는 개일뿐 사람을 대체할 수는 없다”라는 나의 지론은 다른 식구들로부터 “냉정하다”는 지탄을 받곤 했다.

하지만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날이 눈에 뜨이게 쇠약해지는 녀석을 보며 나는 마음이 몹시 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녀석의 모습에서 홀로 노구를 이끌고 살아가시는 친정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느 날 뼈만 앙상히 남은 녀석을 목욕시키다가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할 게 아니라, 서울에 나가 우리 어머니를 목욕시켜 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에 울컥해 지기도 했다.

지난 봄, 한국에 나갔을 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어머니를 목욕시켜 드렸다. 그 전까지는 여든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유방암 수술 자국을 보이기 싫으시다면서 혼자 목욕을 하시던 어머니였다. 목욕을 시켜드리면서 쇠약해진 몸을 보는 일도 가슴 아팠지만, 그 자존심 강하시던 분이 여기까지 오시기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아팠다.

미치 앨봄이 쓴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책에서 보면, 루게릭병으로 죽어가는 모리는 병상에 누운 채 자신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간병인에게 유쾌하게 말을 건넨다. 이 모습을 본 저자는 나중에 모리에게 묻는다. 어떻게 그 순간에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이 때 모리는 “…아침마다 30분(정확히는 기억이 안난다) 나 자신을 연민하는 시간을 갖곤 하지. 그리고 나서는‘이제 됐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준다네…”결국 자기 연민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한 삶의 지름길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부단한 연마와 내공이 필요한 일인데, 다행히 나는 이같은 롤 모델을 우리 어머니로부터 보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이제 내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계절이 바뀌고 있다. 딸아이가 혹독한 사춘기를 겪으며 방황하던 시절에 우리 집에 왔던 녀석은 딸아이가 훌쩍 자란 성인이 되어 이제는 ‘진짜 자신의 삶’(딸 아이 본인의 말이다)을 살기 위해 뉴욕 행을 준비할 때 우리 곁을 떠나갔다.

우리 집은 진짜 ‘빈 둥지’가 되었고 나는 내 인생의 새로운 계절을 징징거림 없이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한수민 국제 로타리 근무>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어느 선술집 벽에 있는 낙서/일본

일본에 주재원으로 23년 살다온 친구가 12월 초에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가 어느 선술집 벽에 있는 낙서를 사진으로 찍어서 번역해준 건데 웃기면서도 의미가 심장합니다.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두 줄 읽고 웃고, 두 줄 읽고 무릎 치고... 와, 뭔가 조금은 통달한 '꾼'이 끄적거린 거 같습니다. <18 81="">  사랑에 빠(溺)지는 18세  욕탕서 빠(溺)지는 81세  도로를 폭주하는 18세  도로를 역주행하는 81세  마음이 연약한 18세  온뼈가 연약한  81세  두근거림 안멈추는 18세  심장질환 안멈추는 81세  사랑에 숨막히는 18세  떡먹다 숨막히는 81세  수능점수 걱정하는 18세  '혈당/압'치 걱정의 81세 아직 아무것 모르는 18세 벌써 아무것 기억無 81세  자기를 찾겠다는 18세  모두가 자기를 찾고 있는  81세. ———-!———!—— 몸에좋고 인생에 좋은 피자 열판 보내드립니다.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허리피자 가슴피자 어깨피자 얼굴피자 팔다리피자 주름살피자 내형편피자 내인생피자 내팔자피자 웃음꽃피자 오늘부턴 신년까지 늘 웃음과 행복한 일만 가득하세요.**

🌶 고 추 장  🌶

🌶 고 추 장  🌶 고추장에 관해서 특별한 체험이 있다. 뜻하지 않게 갈비뼈가 부러져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의 일이다. 한개도 아니고 열개씩이나 골절되어 꼼짝달싹을 못하고 아편으로 통증을 겨우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혈압이 올라가고 혈당이 올라가 혼수지경에 이르니 보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내도 어떻해서든지 날 살려보려고  정성을 다해 음식을 해왔지만 모두가  헛수고일 뿐이었다. 나 또한 집사람을  혼자 살게 만들면 천벌을 받겠기에 열심히 음식을 먹으려 애를 썼지만 구역질만 더 할 뿐이었다. 여행다닐 때 고추장 단지를 꾀차고 다니며 햄버거에 발라먹던 생각이 나서 고추장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고추장을 죽에 넣어 먹으니 신통하게 잘 넘어가는데 그 맛 또한 기가막혀 부글거리는 뱃속까지 편안해졌다. 덕분에 문병오는 사람마다 고추장 단지를 가져오는 바람에  고추장 벼락을 맞을 지경이 되었다. 그 후로는 고추장 단지가 내 식탁에 주인이 되었다.   고추장에 무슨 성분이 들어 있고 무슨  작용을 하는지는 몰라도 신통하기 짝이 없었다. 소태 같던 입맛이 꿀맛이요,  구역질도 잠잠해지고 느글거리던  뱃속까지 고분고분 고추장말을 잘 들으니 과연 고추장의 위력이 대단하다. 내 미국 친구들이 겨울만 되면 단골처럼 감기로 골골대고 있을 때 나는 감기가  뭔지도 모르고 지내고 있다.  그들이 날보고 너는 어떻게 감기 한 번 안걸리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내가  건강한 것은 김치 파워야.  너희들도 김치를 먹어라." 하고  자랑을 했는데 이제는 고추장의 효능이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어린 아기를 달랠 때 호랑이 나온다 하면 뚝 그치고, 순사 온다 하면 뚝 그치듯이 뱃속이 앙탈을 부리면 고추장 먹는다  하면 조용해 질 것 같다.  고추는 남미와 아프리카가 원산지란다. 고추의 매운 맛은 알카로이드의 일종인 캡사이신 때문이란다. 이 캡사이신이  자극을 주어 발효작용을 해서 감기 열을 내리기도 하고 위도 자극해서 위액 분비를 촉진해

우리 아버지 마음 (실 화 (實話))

우리 아버지 마음 (실 화 (實話)) " 헤아릴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 !"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첩첩산중에 상당히 가난한 곳이다.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가정 형편도 안 되고 머리도 안 되는 나를 대도시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나는 대구 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정말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에서 나의 석차는 68/68, 68명 중에 꼴찌를 했다. 지독하게 부끄러운 성적표를 들고 고향으로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표를 부모님께 내밀 자신이 없었다. 무학의 한을 자식을 통해서 풀고자 했는데, 맨 꼴찌라니...! 끼니도 제대로 못 잇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부모님을 떠올리면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 지우개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 1등으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 드렸다. 아버지는 초등 학교도 못다닌 무학이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말했다. "찬석이가 공부를 잘했더나 ? 아버지가 말했다. "앞으로 두고 봐야제, 이번에는 우짜다가 1등을 했는가배...!" "아들 하나는 잘 뒀구먼, 1등을 했으면 잔치를 해야제!" 그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 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 뿐인 우리집 돼지를 잡아 동네사람들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 집 재산목록 제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부지 ~ !"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서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쥐어 박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