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 아래서] 설탕 믿음
한성윤 목사 / 나성남포교회
통 속에 담겨있을 때는 하얀 서리 같은 것이 입속에 들어가면 기막히게 혀끝에서 녹아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하던 것이 설탕이었습니다.
찬장 위에 꼭꼭 숨겨놓고 조금씩 내어 썼기에 아이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엿기름으로 단맛을 내던 시절, 그저 뿌리기만 하면 입속에서 사르르 녹게 하는 설탕은 말 그대로 비교 불가였습니다.
시장에서 사 오신 토마토에도, 잘 익어 보였던 딸기에도 설탕을 뿌려 먹어야 제맛이었습니다. 설탕에 길든 아이들은 토마토보다는 나중에 설탕이 녹아있던 국물을 마시는 걸 더욱 좋아했습니다.
아마도 그 중에도 하이라이트는 수박이었지 싶습니다. 어머니가 손수레에 산처럼 쌓인 수박들을 통통거리며 고르면 수박 아저씨가 삼각형으로 칼집을 냅니다.
시위하듯 칼을 꽂아 꺼내면 빨갛게 익은 속살이 얌전히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색깔까지 확인해서 사오지만 집에서 쪼개보면 아직도 허옇던 수박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냥 먹자니 싱겁고, 버리자니 아까웠기에 역시 설탕을 뿌려 화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마지막에 남았던 달달한 수박물을 씨와 함께 씹어먹던 맛은 아직도 입안에서 잊히지 않는 추억입니다.
유년 주일학교에서 분반 공부를 하던 시절, 선생님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금 비유를 가르치시려고 교회에 소금을 가져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소금 맛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설탕 비유를 하시지 왜 소금 비유를 하셨을까 하고 속으로 투덜댔습니다. 아이는 설탕이야말로 맛을 잃으면 무슨 재미로 살리오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요.
설탕은 대개 사탕수수를 으깨어 즙을 내고 이를 걸러내고 가열해서 정제하는 과정을 통해 나옵니다. 금 같은 믿음이라고 하지만 설탕 같은 믿음도 만만치 않습니다.
금은 모든 불순물을 제거해야 순수한 금이 나오고 값어치가 올라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먹을거리는 너무 많이 끓이고 정제를 하면 오히려 영양가를 잃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은 둘 다 모자란 것 같습니다. 순수한 신앙이란 이제 천연기념물처럼 찾기가 어렵습니다.
완전한 것을 이 땅에서 찾을 수 없음을 모르지 않지만, 믿음에 욕심과 돈이 너무 많이 묻어서 이젠 이것이 믿음인지 욕심인지 구별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믿음이라는 이름표를 탐심에 단다고 거짓과 자랑, 우상과 욕망이라는 악취까지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너무 깨끗해서 고기조차 살지 못하는 증류수가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틀려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하나님보다 더 자비롭고, 하나님보다 더 정의롭습니다. 깨끗하다 보니 마음이 높아져 버렸습니다. 그럴 때는 못 먹는 금보다는 먹는 소금과 설탕을 기억해야 합니다.
맛을 잃어버린 세상에 맛을 주는 것은 증류수가 아니라 설탕물입니다.
귀하고 귀한 금 같은 신앙을 힘껏 지키고,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을 달달하게 하는 설탕 같은 믿음을 자주 보고 싶습니다.
sunghan08@gmail.com
KoreaDaily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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