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9(일) -청춘의 가시관- (2769)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유명한 시를 남긴 여류시인 모윤숙은 그가 노래한 그 ‘국군’이 지킨 대한민국이 살아 있는 동안은 함께 살아 있을
겁니다. 그 시를 ‘조국을 기리는 영원한 명시’로 꼽는 한국인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일제 시대의 이화여전이 키운 저명한 시인이 두 사람 있었는데 또 한 분은 노천명이었습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를 읊은 이 시인은 모윤숙과는 사뭇 다른 인생길을 더듬었습니다. 모 시인은 밝고 외향적이고 적극적이었던 반면에 노 시인은 내성적이고 소극적이고, 자기에게 있었던 일들을 남에게 다 털어놓을 수 없는 듯, 어딘가 어두운 면이 있었지만, 상냥하고 다정하고 매우 여성적이었는데 두 분이 다 시(詩)의 천재를 타고난 출중한 여성들이었습니다. 노천명은 김활란 박사께서 그의 평생 친구이던 절세미인 이정애(李貞愛) 여사의 전기 <우리 친구 이정애>를 최완복(崔完福)과 함께 집필할 때 셋이 몇 번 자리를 같이 하였습니다. 노천명은 그 나이에도 소녀 같은 수줍은 성품을 감추지 못하는 여자다운 여자였고, 그 해(1955년) 내가 미국 유학길에 올랐을 때 당시의 반도 호텔(오늘의 롯데 호텔)까지 나와서 나를 전송해준 그 일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6.25 피난 시절에 출간된 그의 수필집 <나의 생활백서>에서 그가 아침에 부산의 어느 시장에 가서 시골 아낙네들이 광주리에 이고 온 싱싱한 산나물들을 둘러보고, “산나물 같은 사람은 없는가”라고 적은 것을 나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노 시인이 미국 가 있던 나에게 편지 한 장을 띄우면서, ‘그 산나물 같은 사람’을 찾은 것 같다고 젊은 나를 칭찬해 준 그 편지의 그 한 줄의 줄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내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는 노천명은 이미 저세상으로 떠나고 없었습니다. 왜 오늘 아침 내 글의 제목을 ‘청춘의 가시관’이라고 하였는가? 이 말은 모윤숙의 글에 나오는 한 마디입니다. “청춘의 가시관을 벗고”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 한 마디가 젊음을 고민하던 20대의 내 마음에는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에 나이 90을 바라보는 오늘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의 젊음을 되돌려 주오”라고 나는 하늘을 향해 호소하지 않습니다. 그 가시밭길을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기 때문입니다. “나이 듦이 고맙다”는 내 말이 결코 빈 말이 아님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
일본에 주재원으로 23년 살다온 친구가 12월 초에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가 어느 선술집 벽에 있는 낙서를 사진으로 찍어서 번역해준 건데 웃기면서도 의미가 심장합니다.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두 줄 읽고 웃고, 두 줄 읽고 무릎 치고... 와, 뭔가 조금은 통달한 '꾼'이 끄적거린 거 같습니다. <18 81=""> 사랑에 빠(溺)지는 18세 욕탕서 빠(溺)지는 81세 도로를 폭주하는 18세 도로를 역주행하는 81세 마음이 연약한 18세 온뼈가 연약한 81세 두근거림 안멈추는 18세 심장질환 안멈추는 81세 사랑에 숨막히는 18세 떡먹다 숨막히는 81세 수능점수 걱정하는 18세 '혈당/압'치 걱정의 81세 아직 아무것 모르는 18세 벌써 아무것 기억無 81세 자기를 찾겠다는 18세 모두가 자기를 찾고 있는 81세. ———-!———!—— 몸에좋고 인생에 좋은 피자 열판 보내드립니다.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허리피자 가슴피자 어깨피자 얼굴피자 팔다리피자 주름살피자 내형편피자 내인생피자 내팔자피자 웃음꽃피자 오늘부턴 신년까지 늘 웃음과 행복한 일만 가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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