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계’ (노유미 / 번역가) |
입력일자: 2015-05-26 (화) |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 있게 둘러보는 곳은 서재
혹은 책장이다. 서재를 보면 그 주인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질문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궁금증으로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의
제목을 둘러보곤 한다.
그러다 혹 나와 같은 책을, 더구나 애장하고 있는 책을 갖고 있는 누군가라도 만나면, 이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어떻게 저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저 책을 골랐으며, 또 읽은 후에 당신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등등, 많은 질문들이 떠오른다.
누군가 “인생은 정답보다는 좋은 질문을 즐기는 자에게 더한 지혜가 있다고 평한다”는 말을 했다. 책의 어떤 부분이 끌려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책을 고르기까지 그들이 갖고 있었던 인생의 고민이나 궁금증들이 공유되고 또 함께 사유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어찌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있을까.
소통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들은 많지만, 그 가운데 실제 마음 속 깊은 고민과 또 생각을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이는 고작 얼마나 될까.
군중 속의 고독의 실체가 커뮤니케이션 부재라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같은 책을 공유하고 그 속을 여행했을 누군가와의 만남은 필히 반갑고 또 유쾌한 것이라 할만하다.
또 스스로의 책 사는 습성에 미루어 짐작하자면, 구입한 책을 통해 그들이 기대하고 꿈꾸고 또 갈망하는 인생의 답들을 예상할 수 있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다양함만큼이나 그것을 해석해내거나 용납하는 태도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어쩌면 우리는 답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답의 공인된 동조자를 구하고 싶어 책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는 부족한 이론과 언어로 그럴싸하게 자신의 크고 작은 아픔들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위로자를 만나기 위한 책으로의 여정을 누가 쉬이 순수하지 못한 독서의 목적이라 탓할 수 있을까.
읽는다는 행위는 매우 개인적이라는 의미에서 매력적이다. 지극히 개인적 매체를 가지고 타인과의 대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의 시간에 갖는 저자의 생각과의 은밀한 만남. 평소 입 밖으로 드러내놓지 못하는 은밀한 이야기들을 비로소 책속 화자와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용납되지 못할 것은 없다. 그 어떤 생각과 가치관이던 그것의 뿌리를 솔직히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며, 가끔 쓰게 자란 뿌리로 인해 그간 겪어왔던 삶의 어려움들의 궁극적인 해결책도 모색해 볼 수 있는 장이 마련되기도 한다.
종종 바쁘고 정신없는 삶에 대한 불평을 갖게 된다. 좀처럼 스스로 주도할 수 없는 삶의 실체가 파악되고 드러날수록 답답함은 더욱 가중된다.
그럴 땐 오히려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더 주도적으로 ‘타인의 시계’에 내 시간을 맡겨보는 것도 좋은 해결책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타인의 시계에 따라 그들이 인도하는 세상을 걷다보면, 신기하게도 어느새 회복되어 있는 ‘나의 시계’를 경험하게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다 혹 나와 같은 책을, 더구나 애장하고 있는 책을 갖고 있는 누군가라도 만나면, 이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어떻게 저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저 책을 골랐으며, 또 읽은 후에 당신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등등, 많은 질문들이 떠오른다.
누군가 “인생은 정답보다는 좋은 질문을 즐기는 자에게 더한 지혜가 있다고 평한다”는 말을 했다. 책의 어떤 부분이 끌려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책을 고르기까지 그들이 갖고 있었던 인생의 고민이나 궁금증들이 공유되고 또 함께 사유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어찌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있을까.
소통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들은 많지만, 그 가운데 실제 마음 속 깊은 고민과 또 생각을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이는 고작 얼마나 될까.
군중 속의 고독의 실체가 커뮤니케이션 부재라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같은 책을 공유하고 그 속을 여행했을 누군가와의 만남은 필히 반갑고 또 유쾌한 것이라 할만하다.
또 스스로의 책 사는 습성에 미루어 짐작하자면, 구입한 책을 통해 그들이 기대하고 꿈꾸고 또 갈망하는 인생의 답들을 예상할 수 있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다양함만큼이나 그것을 해석해내거나 용납하는 태도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어쩌면 우리는 답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답의 공인된 동조자를 구하고 싶어 책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는 부족한 이론과 언어로 그럴싸하게 자신의 크고 작은 아픔들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위로자를 만나기 위한 책으로의 여정을 누가 쉬이 순수하지 못한 독서의 목적이라 탓할 수 있을까.
읽는다는 행위는 매우 개인적이라는 의미에서 매력적이다. 지극히 개인적 매체를 가지고 타인과의 대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의 시간에 갖는 저자의 생각과의 은밀한 만남. 평소 입 밖으로 드러내놓지 못하는 은밀한 이야기들을 비로소 책속 화자와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용납되지 못할 것은 없다. 그 어떤 생각과 가치관이던 그것의 뿌리를 솔직히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며, 가끔 쓰게 자란 뿌리로 인해 그간 겪어왔던 삶의 어려움들의 궁극적인 해결책도 모색해 볼 수 있는 장이 마련되기도 한다.
종종 바쁘고 정신없는 삶에 대한 불평을 갖게 된다. 좀처럼 스스로 주도할 수 없는 삶의 실체가 파악되고 드러날수록 답답함은 더욱 가중된다.
그럴 땐 오히려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더 주도적으로 ‘타인의 시계’에 내 시간을 맡겨보는 것도 좋은 해결책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타인의 시계에 따라 그들이 인도하는 세상을 걷다보면, 신기하게도 어느새 회복되어 있는 ‘나의 시계’를 경험하게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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