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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한국 사이 /김동길




2015/03/31(화) -미국과 한국 사이- (2526)

이웃에 있는 나라이건 멀리 있는 나라이건 우리와 사이가 좋을 수도 있고 사이가 나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사아기 나쁩니다.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에 한반도에 침공하여 우리의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무고한 백성을 수없이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역사에서 항일(抗日)이나 반일(反日)은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1910년의 한일합방과 그 후 35년의 강점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미국은 태평양을 넘어 아주 먼 곳에 있는 나라이지만 우리와는 무척 가까운 나라입니다. 개화기에 일본이 우리에게 강요한 불평등조약과는 달리 미국이 주선하여 우리와 맺은 1882년의 <한미수호통상조약>은 우리를 국제사회의 떳떳한 멤버로 처음 받아주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은 현대문명과는 거리가 멀던 이 나라에 와서 최초의 병원이라고 할 수 있는 제중원(濟衆院)을 세우고 배재학당, 이화학당, 연희전문 등을 설립하였는데 설립자들은 다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알렌, 언더우드, 아펜셀러는 모두 한국인의 은인들입니다. 그들이 오지 않았다면 오늘의 한국이 오늘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국의 근대화는 미국과 밀접하게 얽혀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종살이하던 억울한 세월에 우리들의 친구가 되어 우리를 돕고 위로한 사람들은 매우 머나먼 나라인 미국에 살던 미국인들이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미국의 언론을 통해 한국의 억울한 사정을 전 세계에 알려준 이들도 선교사들이었고 미국인들이었습니다.

연합국이 승리하여 우리는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 우리를 먹여 살린 사람들은 미국에 있었습니다. 6‧25 사변이 벌어졌을 때 누가 먼저 달려와 우리를 살렸습니까? 미군입니다. 전쟁 3년에 그들은 54,246명의 전사자와 103,284명의 부상자와 8,177명의 행방불명자를 내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김일성이 아니라면 누구도 이 한국 땅에서 반미(反美)를 주장할 구실을 찾을 수 없습니다. 미국은 우리의 혈맹(血盟)입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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