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자유, 아다지오
처음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을 보면 누구나 빨리 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정해진 템포보다 빨라지는 일이 다반사다. 손가락이 건반 위를 빠르게 질주하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왠지 빨리 치면 잘 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 피아노 치는 아이뿐일까. 우리 모두는 자타가 공인하는 초고속 사회의 시민이다. 우리에게 속도는 경쟁력이고 덕목이며 또 자랑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경제가 이만큼 발전한 것도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매사에 빠르기 때문이라지 않은가.사실 빠르다는 것이 주는 혜택이 적지 않다. 아침에 책을 주문하면 저녁에 문 앞까지 가져다 주는 나라가 지구상에 또 있을까. 식당에 가면 한 손으로 식탁을 훔치면서 여러 명의 주문을 동시에 받아 처리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대단한 멀티태스킹 능력이라고 할 수밖에. 이렇게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속도에 중독되고 속도 예찬론자가 되는 모양이다. 오죽하면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라고 할까.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혜택만큼 부작용도 크다. 우리나라가 괜히 사고 공화국이겠는가. 새해부터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사건사고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으나 결국 과정보다는 결과를, 그것도 빨리 만들어내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빠른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긴장과 희생이 필요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은 어느 순간 끊어지게 마련이다. 빠른 사회는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우리를 소진시키거나 도태시킨다. 고질적 갑을관계나 병리적인 감정노동 역시 속도사회를 그 자양분으로 한다.
욕속부달(欲速不達), 빨리 하려고 하면 오히려 도달하지 못한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몸으로 체험해 알고 있는 이야기다. 느려야 즐길 수 있기도 하다. 천천히 갈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는 법이니까. 음악은 더욱 그렇다. 깊은 울림과 긴 여운은 느린 음악에서 나온다. 빠르기만 한 음악은 자극적이지만 공허하다. 소나타가 오랜 세월 꾸준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빠른 템포와 느린 템포가 교대되면서 긴장과 감흥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속도의 완급이 주는 템포의 힘이다.
자동차 이름으로 익숙한 소나타는 원래 기악곡이라는 뜻이다. 처음으로 노래나 춤 없이 악기로만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 ‘악기가 소리 낸다(sonore)’는 뜻으로 소나타(sonata)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바로크 이전만 해도 악기만 연주하는 것은 음악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본디 시와 음악은 한 몸이었고 가사가 없는 기악음악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소나타는 노래나 춤이 없어도 악기 소리만을 통해 극적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 곡 안에 빠르기가 다른 서너 개의 악장들이 각자의 템포와 박자로 율동감을 주도하고, 주제와 조성의 변화가 스토리라인을 만들면서 악기들만으로도 오페라에 필적하는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했던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소나타에 비유하자면 느린 아다지오다. 성장이 둔화되고 취업난에, 높아가는 세금 등 활력을 잃은 모습이 역력하다. 빠른 속도에 익숙해진 우리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그래서인지 위기감도 그만큼 높고 불만과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그렇지만 이참에 생각을 조금 바꾸어보면 어떨까. 넘어진 김에 쉬어갈 수도 있지 않은가. 느린 아다지오로도 인생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으니까. 플래툰의 영화음악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그 어떤 빠른 비트의 음악보다도 충일하고 감동적이다. 전쟁터를 배경으로 인생의 깊은 모순과 아름다음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템포가 느리기 때문에 비로소 느낄 수 있는 매력이다.
빠른 알레그로만으로는 사람을 흥분시킬 수는 있어도 가슴 저리게 할 수는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성공이나 보람은 항상 느리지만 차분한 성찰과 준비를 필요로 한다. 우리 인생에도 아다지오가 필요하다. 그러니 조급증을 버리고 현재의 느린 악장을 잠시라도 즐기는 것이 어떨까. 다시 정신없이 앞만 보고 뛰어야 할 때가 곧 올 테니 말이다. 어차피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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