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명동 여행기
30년 전 서울 명동은 쌀쌀한 주말 저녁이 좋은 고즈넉한 거리였다. 1980년대 초 명동성당 교리반에 들어간 고등학생은 이 동네만 가면 어른 흉내를 냈다. 지금은 없어진 카페 곰화랑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커피 맛을 배웠다. 고교 2학년 말 첫 미팅 때 첫눈을 맞으며 파트너와 찾아간 곳도 여기였다. 11월 말부턴 골목길 초입 레코드 가게에서 크리스마스캐럴이 흘러나왔다. 내 추억 속 명동은 그렇게 엘레지(悲歌)란 말이 잘 어울리는 애잔한 느낌이다.중국 국경절 연휴(1∼7일)가 한창이던 4일 아내와 중3짜리 딸을 데리고 유커(游客·중국인 관광객) 체험차 명동에 갔다. 강남, 동대문 등으로 많이 흩어졌다지만 연휴 기간 한국을 찾은 16만4000명의 유커 중 절반쯤은 명동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물결처럼 골목골목에 밀려드는 그들을 향해 옷 가게, 화장품 가게 직원과 아르바이트생들이 피켓을 들고 중국어로 목청을 높였다. 이달 청년 취업률이 높아지겠다 싶었다.
중국 청소년에게 인기가 높다는 의류 브랜드 점포 쇼윈도에는 중국인 취향의 번쩍거리는 황금색 옷과 가방들이 잔뜩 진열돼 있었다. 가게 안 직원들은 한국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쇼핑백을 잔뜩 든 중국인 관광객이 들어오면 재빨리 달려들었다. 국경절 기간 중국인 관광객이 한국에서 쓴 돈은 약 4000억 원. 30년 전 팝송 카세트테이프를 팔던 레코드 가게 문에는 한류(韓流) 아이돌그룹의 이름과 포스터가 중국인을 겨냥해 잔뜩 붙어 있었다. 내가 알던 명동이 아니라 ‘중국의 명동’이었다.
10여 년 전 중국 상하이 푸둥(浦東)에 같이 간 진념 전 경제부총리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지금은 우리가 중국에서 발마사지를 받지만 우리 세대가 제대로 못하면 10년, 20년 뒤엔 우리 자녀들이 중국인 발마사지를 하며 살게 될지 몰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명동 네일숍, 마사지숍의 중국인 고객 비중은 아직 10% 수준이란다. 그들에겐 가격대가 높다.
하지만 이미 고급 호텔에 묵으며 백화점을 찾아 수천만∼수억 원대 쇼핑을 하는 중국인 ‘서상커(奢尙客)’가 늘고 있다. ‘서상(奢尙)’은 럭셔리 스타일이란 뜻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GDP)에서 중국은 이미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중국인에 치인 한국인들 사이에서 투덜거리는 소리도 새나왔다. 음식점 옆자리의 젊은 한국인 여성들이 수군거렸다. “중국 사람들 정말 시끄럽지 않니?” “어깨가 부딪쳐도 미안해하질 않아.” “옷 입은 걸 보면 너무 티가 나.” 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 스웨덴 스톡홀름 출장 때 겪은 일을 들려줬다. 짬을 내 도심 투어버스를 타고 스웨덴 왕궁 앞을 지날 때였다. 버스 안 서양인들 사이에서 와락 웃음이 터졌다. 왕궁 정문에 동상처럼 서 있던 근위병이 다짜고짜 총을 잡아당기는 동양인들에게 끌려가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딱 봐도 기념 촬영을 하려는 한국인 아저씨였다.
후배 기자가 10여 년 전 미국에서 경험한 일도 얘기해줬다. 재킷이 구겨져 다리미를 달라고 요청하자 “한국인들이 잔뜩 왔다 간 뒤 다리미를 모두 치웠다”고 호텔 관계자가 답했다. 방안 다리미를 뒤집어 놓고 삼겹살을 구워 먹다가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10∼20년 전 우리 모습은 지금 중국인 관광객들과 많이 비슷했다.
올 한 해 한국을 찾을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인은 600만 명. 이들 때문에 내 추억 속의 명동은 사라졌다. 그 대신 우리 경제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명동이 생겨났다.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몰린다는 날, 짬을 내 자녀와 함께 명동에 가보길 권한다.
박중현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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