柵『위험한 이웃, 중국과 일본』
리처드 C. 부시 지음, "에코리브르"호랑이 두 마리가 같은 산에 살 수 없다
♨ 세상엔 기존 강국 미국과 신흥 대국 중국 간의 패권 경쟁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양국은 큰 덩치에 걸맞은 성숙한 모습으로 양국 관계를 비교적 잘 관리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적절한 경제와 관여를 병행하는 ‘봉쇄적 개입(congagement)’ 정책으로, 중국은 미국과 다투기는 하되 그 관계까지 깨지는 않는다는 ‘투이불파(鬪而不破)’의 대책으로 말이다. 이 책은 동북아에서의 충돌이 미·중보다는 오히려 중·일에 의해 촉발될 공산이 크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의 리처드 C. 부시 박사는 ‘하나의 산에 호랑이 두 마리가 살 수 없다(一山不容二虎)’는 중국 속담을 인용하며 중·일의 충돌 가능성을 설명한다. 설마 양국이 물리적으로 부딪치는 일이 일어나겠는가 싶지만은 이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은 필요할 듯싶다. 최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막가파’식 행태를 보면 더욱 그런 필요성을 절감한다. 두 나라가 우리 수역인 풍도 앞바다와 우리 땅인 평양에서 맞붙었던 청·일 전쟁이 올해로 120주년을 맞았다.
또 그때처럼 무기력하게 두 나라의 패권 다툼을 하릴없이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 책의 원제는 『근접성의 위험(The Perils of Proximity』인데 우리말로는 『위험한 이웃, 중국과 일본』으로 붙였다. 중국과 일본이 위험한 이웃이라는 이야기이겠지만 중국과 일본 모두 우리에겐 위험한 이웃이라는 뜻의 중의적(重義的) 해석도 가능하다. 우리는 현재 이웃인 중국과 일본이 모두 강대국이라는, 보기 드문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시 박사가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꽤나 유용하다. 책에 나오는 중요 대목을 음미해보자.
☞ “각 나라의 국민이 조성하는 정치적 환경은 지도층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일본의 여론은 중국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데다 경쟁적인 대중 매체가 이러한 여론을 더욱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와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비민주적이지만 인터넷과 친근한 중국인은 날카로운 반일 민족주의 감정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15~16쪽)
☞ “빚은 돈으로 갚아야 하고 살인자는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20쪽)
☞ “장제스의 처남 쑹쯔원(宋子文)은 1937년 8월 ‘일본군은 중국군을 우습게 보는 반면 중국군은 스스로를 과신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나라는 벼랑 끝 전술을 쓰다가 정말 벼랑으로 떨어진다” (27쪽)
☞ “(중·일은) 1972년 9월 국교를 수립했다…베이징의 지도자들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역사 문제를 들춰낼 것이고 때가 되면 도쿄 쪽에서도 적절한 반성의 뜻을 표명하리라는 점에서 암묵적인 상호 이해가 깔려 있는 듯했다…하지만 두 나라는 날로 증강되어가는 상대의 군사력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중기적인 장래에 자기 나라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지난 20세기에 드리웠던 그늘이 바야흐로 열리고 있는 21세기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이다” (29~30쪽)
☞ “중일 관계를 연구하는 고쿠분 료세이(國分良成)는 2005년 중반 ‘옛날에는 일본과 중국 간에 사고가 일어나면 밀사를 비롯한 갖가지 통신 채널을 동원해 해결책을 모색했다’고 서술했다” (35쪽) (촌평: 적지 않은 이들이 양국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막후에서 조정할 수 있는 원로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역사문제를 둘러싸고 가장 격렬하게 논쟁을 벌인 건 1998년 11월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다. 이때 일본 측에서는 만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가 (한국에 대해 했던 것처럼) 지난날의 침략에 대하여 역대 총리들보다 더 분명하게 사죄의 뜻을 표명한다면 중국은 아마 그것을 ‘마지막 언급’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장쩌민은 오부치 게이조가 한국에 대해 표명했던 식의 사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미 역사 문제를 놓고 ‘사죄하기에 지친’ 일본 지도층을 향해 일장 훈계를 늘어놓았다…장쩌민의 일본 방문은 새로운 흐름을 몰고 왔다. 말하자면 중국이 역사 문제를 들춰봐야 그것이 더 이상 지렛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일본이 원조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중국의 자제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듯 중국도 날이 갈수록 1930년대와 40년의 기억을 들춰내는 것만으로는 일본의 행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39쪽)
☞ “고이즈미가 총리 신분으로 신사를 참배한다는 것은 곧 침략 전쟁의 역사적 책임을 벗어 던지고 정치적·군사적 강국의 꿈을 향해 나아가려 하는 것이다” (40쪽)
☞ “(마이클 그린과 크리스토퍼 허그스) 이 두 전문가는 동북아시아가 넓은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중일) 두 나라의 처지를 우려했다. 이를테면 중국인들이 흔히 말하는 ‘호랑이 두 마리가 같은 산에 살 수 없다’’는 말이 옳을 수 있다는 것이다” (49쪽)
☞ “타이완과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취하는 태도나 자위대의 증강을 바라보는 중국 지도층의 시각은 1894년에서 1895년에 걸친 전쟁과 1930년대 말의 만주 침략 및 중국 북동부를 점령했던 사실들에 대한 기억으로 뒤틀려 있다…중국은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의 평화로운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 일본을 끝내 신뢰하지 않았고, 1972년 이후 중국의 경제 발전에 일본이 기여한 것에 대해 아무런 고마움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이 전쟁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이러한 사실들 앞에서 거듭 좌절을 경험했다” (57~58쪽) (촌평: 중국과 일본의 입장에 기계적인 균형을 취하는 것은 서방 학자들에겐 안전한 스탠스일지는 몰라도 일본으로부터 극심한 피해를 입은 아시아인들에게는 설득력이 약하다)
☞ “중국과 일본이 과거사를 배경으로 현재의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음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중국의 경우에는 3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 사악한 일본에 희생당한 중국. (두 번째) 일본의 사죄가 과연 진실한 것인지를 가리는 심판자로서 중국. (세 번째) 좌절에 부딪친 반란 세력으로서 중국…한편 일본의 관점은 중국의 경우와 사뭇 대조적이다. (첫 번째) 제2차 세계대전의 침략자로서 일본. (두 번째) 억울하게 제소당한 피고 또는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로서 일본. (세 번째) 민간 주도국 또는 중진국으로서 일본. (네 번째) 취약한 섬나라 일본…중국인의 관점이 일방적인 반면 일본인의 관점이 다양하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중국이 일본을 포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이 중국을 포용하기가 훨씬 쉬울 것으로 보인다”(59~63쪽)
☞ “중국은 바다보다는 육지에 관한 영토 분쟁에서 훨씬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다의 문제라면 협상이 매우 까다로우며 자국의 처지가 개선될 때까지 타결을 늦추려 하기 십상이다” (116쪽)
☞ “(중일 간에는 4개의 마찰 지점이 있다) 첫 번째는 전적으로 영토 문제의 성격을 띠고 분쟁의 불씨가 되어 있는 댜오위/센카쿠 열도이다. 두 번째는 동중국해의 석유 및 가스 자원에 대한 개발권이다. 세 번째는 (중국이 태평양에 진출하려 할 때 통과하면 편리할 일본의) 해협 통행의 문제이고, 네 번째는 타이완 해협의 문제다” (116쪽)
☞ “(댜오위/센카쿠 열도와 관련해) 중국은 자국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다음 두 가지 근거를 내세운다. 그 하나는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서 명나라 때 간행된 문집과 지도 속에 이 섬들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1894년부터 1895년에 걸쳐 벌어진 중일전쟁의 결과 1895년에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이 섬들이 일본 쪽으로 넘어갔다는 주장인데, 이 조약은 ‘불평등 조약’으로 1945년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그 조항들이 무효화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은 다음 몇 가지 근거를 내세워 자국의 주장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려고 한다. 첫째, 일본제국 정부는 1879년 류큐 열도와 더불어 이 섬들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해 1895년 공식적으로 일본 영토에 통합했다는 것이다. 둘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미국은 류큐 열도에 대한 신탁 통치를 실시하면서 그 범위 안에 특별히 센카쿠/댜오위 열도를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셋째, 워싱턴이 1971년의 오키나와 반환 조약에 따라 이들 지역에 대한 행정 관할권을 일본에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124쪽)
☞ “1978년 일본과 중국이 평화 조약을 체결했을 때, 덩샤오핑은 두 나라가 이 섬들의 영유권 문제는 뒤로 미루고 에너지 자원의 공동개발을 먼저 추진하자고 선언했었다” (125쪽) (촌평: 덩샤오핑이 영유권 문제를 뒤로 미루고자 한 본뜻과 관련해선 중국이 실력을 키울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를 지낸 토머스 크리스텐슨의 지적에 따르면, 중국은 취약성의 창문이 열리고 있거나 기회의 창이 닫히고 있다고 여길 때면 더욱 빈번하게 무력 사용을 해왔다고 한다. 베이징은 전술적으로 군사 상황을 평가하면서, 비록 상대가 우위에 있더라도 그러한 우위가 시간이 지날수록 확고해질 것이라고 여길 경우 싸우는 쪽을 선택했다. 이와 비슷하게, 전통적 의미의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하더라도 분쟁에 뛰어드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익이라고 여겨지면 분쟁에 뛰어들었다” (197~198쪽) (촌평: 마오쩌둥이 왜 열세의 전력을 갖고도 한국전에 뛰어들었는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는 대목이다)
☞ “크리스텐슨은 인민해방군의 전술 교범인 <<전역학(戰役學>>에서 유익한 발견을 했다. 첫째로 중국의 전략가들은 인민해방군의 능력과 그들보다 앞선 나라의 군대가 지닌 능력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금세 파악할 만큼 현실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또한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약자가 강자를 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둘째, 크리스텐슨은 <<전역학>>이 상대의 전투의지 자체에 바로 취약성이라는 열쇠가 도사리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민해방군은 굳이 상대의 군사 능력을 파괴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다만 싸우려는 생각 그 자체를 파괴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중국이 선제적으로 행동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점에 주목한다. 상대의 우세한 힘 앞에서 ‘기습적이고, 대담하고, 맹렬한 공격’을 감행해 승리의 기회를 잡으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8쪽)
☞ “중국 국가해양국 국장 쑨즈후이는 특히 일본에 강력한 결의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일본을 상대로 첨예한 분쟁에 뛰어드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일본으로 하여금 우리가 주권을 지키기 위해 어떤 어려움이라도 무릅쓰면서 물러설 때까지 밀어낼 것이라는 우리의 결의를 과시함으로써 우리가 이 문제를 적절히 다룰 것이라는 사실을 바로 보게 하려는 것이다’” (200쪽)
☞ “중국이나 일본 모두 바깥세상을 향해 외쳐대듯이 그리고 바깥세상에서 보아주기를 바라듯이, 군사 작전의 수행에서는 결코 평화주의자들이 아니다. 중국은 분명히 선제적인 성향의 전략 문화를 갖고 있다…(일본도) 자위대의 임무 수행 지역이 본토에 가까울수록 일본 전략 문화의 방어적이고 절충적인 측면은 차츰 자취를 감투고 더욱 공격적인 성향이 고개를 쳐든다” (210쪽)
☞ “일본의 전략적 의도를 나타내는 지표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중국 학자들은 다섯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는 친기업적이거나 평화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정치가들에 비해 우익 정치세력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전후(戰後) 일본 군사력의 사용에 대한 헌법적·법적 제약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지, 아니면 완화되고 있는지가 능력 자체의 변화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미일동맹이 더 강화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넷째는 일본의 타이완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지지하려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째는 일본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중국을 침략하고 점령한 사실에 대해 얼마나 성실하게 책임을 지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표가 모두 ‘향후 정세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보지만, 그 그림자가 얼마나 어두운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327쪽)
☞ “(중국의) 온라인에서 행동주의를 부추기는 요인은 세 가지다. 시민사회의 등장, 국내문제와 대외정책을 둘러싼 논쟁, 그리고 인터넷 사용자의 창의성이 바로 그것이다…인터넷 사용자들이 주로 민족주의적인 내용을 선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정치적으로 안전하기 때문이다…인터넷에서 일본에 관한 주제는 정보 전파와 대중 동원의 두 가지 기능이 안전하게 결합된 하나의 이슈였다…(중국 정부로선) 인터넷에 올라오는 대중의 항의를 못 본 체하다가는 허약하다고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대중의 반일 감정을 무턱대고 편들다가는 정책의 기조가 흔들리고 두 나라의 관계가 위태로워진다. 또한 일본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정권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번질 위험성도 있다” (336~337쪽)
☞ “(중일) 두 나라 사이에 충돌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베이징과 도쿄의 의사결정자들에게 하나의 충격적 사건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건은 그들 중 어느 쪽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분야의 상호관계에서 빚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사건은 순전히 우연하게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예상되는 충돌은 자기 나라의 정책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확신하는 양쪽의 부대들 사이에 의지를 시험하는 과정에서 빚어질 것이다” (429~430쪽)
☞ “중국 지도부, 특히 군사 지도자들은 1945년 이전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점령했던 역사를 통해 현재의 충돌을 보려 한다. 반면 일본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힘이 제자리에 머무는 동안 군사력을 키워나가고 있는 중국에 대한 두려움이 담긴 시각에서 같은 사건을 바라볼 것이다…위기 현장에서의 일차적인 관계 악화, 그릇된 정보, 그리고 대중의 격분 같은 것들이 조합되어 두 나라의 지도자들을 흔들어 놓을 것이다” (430~431쪽)
☞ “(센카쿠/댜오위 열도에 대한 주권을 누가 갖고 있는지에 대해) 워싱턴은 아무런 태도도 밝히지 않고 있지만, 센카쿠/댜오위 열도는 일본이 관할하는 지역이다. 2004년 2월, 부시 행정부의 고위 관료는 공개적이면서 명백하게 미일 조약은 ‘관할하는 영토’에 적용된다는 점을 재천명함으로써, 만일 인민해방군이 그 섬을 공격하거나 점령할 때 미국은 일본을 도와줄 의무가 있음을 밝혔다…미국은 일본의 요구를 못 본 체 할 경우 도쿄와의 관계에서 심각한 정치적 대가를 치러야 할 뿐 아니라 일본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안보를 미국에 의지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에 대해 신뢰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434쪽)
☞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게 중국의 반일 민족주의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공산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고무하는 한편 대중이 대일 정책을 너무 약하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주저 없이 정권에 대한 반대를 불러 일으킨다” (483쪽) (촌평: 중국 인민의 반일 시위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 중국 공산당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유상철 중국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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