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원의 믿음
신학자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1차원적인 믿음에서
4차원적인 믿음까지 '믿음'에도 수준이 있고 점점 발전한다고 했습니다.
1차원 믿음은 인정(Assent)하는 믿음입니다.
직접 경험하거나 확인할 길이 없는 것에 대한
진술이나 명제를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이 실존하였던 것처럼
예수님도 실존하였다고 인정(승인Assent)하는 것입니다.
인정의 반대말은 '의심'인데,
교회에서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니까.
일단 믿어봐!"라고 하는 것이나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교회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면
무조건 "아멘" 하면서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정하는 믿음은 성경이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18세기 이전까지는
기독교 안에 '인정하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사이비 이단이 많은 것은
이런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인정하는 믿음'이 판을 치기 때문입니다.
18세기 계몽주의와 더불어 과학이 발달하면서
과학이 증명한 것만 진리라고 믿는
맹목적인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진화론이 과학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성경에 명백한 증거가 있는 하나님의 창조,
노아의 홍수같은 성경의 사실들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며
사실이 아니라고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교회 지도자들은
"아니야 그것은 사실이야! 믿어 무조건 믿어!
'사실'이라고 인정하라고..."
결국 믿음은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사실이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을
사실로, 참말로, 정말로 인정하는 것으로
이상하게 바뀌고 말았습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이런 인정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고,
또 처음부터 내려온 바른 전통의 믿음도 아닙니다.
2 차원의 믿음
2차원 믿음은 신뢰(trust)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지금 믿음이라고 믿고 있는 '인정하는 믿음'은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18세기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며, 18세기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18세기 이전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내 처지와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향해
"나는 하나님만 믿습니다." 하고
'딱' 내어 맡기는 믿음입니다.
성경이야기나 교리 같은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과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명제, 교리나 신조같이
말로 된 것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신의와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 믿음에 대해
"천만 길도 더 되는 깊은 바닷물에
나를 턱 맡기고 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잔뜩 긴장을 하고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더 빨리 가라앉고 말지만,
긴장을 풀고 느긋한 마음으로 몸을 물에
턱 맡기고 있으면 결국 뜨게 되는 것입니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신뢰의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걱정, 불안, 초조, 두려움, 안달 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딱 맡기는 믿음'이 있으면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믿음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라.
이런 걱정은 이방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필요한 줄을 아신다."(마6:31-32)
하나님의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믿고,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불안과 초조, 근심과 걱정,
스트레스와 긴장이 많은 세상에서는 마음 턱 놓고
맡기는 신뢰의 믿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신뢰의 믿음이 진리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되 눈 딱 감고 턱 맡기고
하나님께로 그냥 풍덩 뛰어들어야 합니다.
3 차원의 믿음
3차원 믿음은 성실성(faithfulness)의 믿음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의 말은 무슨 말을 해도 그 말을 신뢰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참 믿음직스럽습니다.
그 사람은 믿을 만 합니다." 라고 할 때의
그 믿음이 '성실성의 믿음'입니다.
1, 2차원의 믿음이 '이기(利己)'의 믿음이라면
3차원의 믿음은 '이타(利他)'의 믿음이 됩니다.
내가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타인이 나를 보고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나와 하나님과 타인의 3자 관계 속에서 3차원의 믿음이 생깁니다.
세상 사람들이 한국 교회를 보고 "믿을 만 하다. 신뢰할 만 하다.
교회가 하는 일은 언제나 옳아."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 정상인데
"이 땅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집단은 정치인과 기독교인들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이미 한국 기독교는
믿음이 없는 가짜 기독교입니다.
교회가 문 걸어 잠그고 안에서만 자기들끼리
박수치고 드럼치며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래서는 3차원의 믿음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성실성의 믿음은 내가 나를 위한 믿음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내가 '믿음'이 되는 것인데,
거기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믿음도 포함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믿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면서도
다른 신을 믿고, 돈을 믿고, 권력을 믿고, 조직을 믿고,
교단을 믿고, 선배를 믿고 다른 것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우상숭배'라고 하시면서
'네가 저를 믿든지 나를 믿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우리에게는 지금 하나님께로부터도 신임을 받고,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3차원의 믿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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