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랑이 없어야 진짜입니다 >
율법적인 행위와 신앙적인 행위에는 두 가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율법적인 행위는 어떻게 행동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이지만 신앙적인 행위는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으니까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적인 행위는 자랑이 따르고 신앙적인 행위는 자랑이 없습니다. 결국 삯을 받는 종처럼 자기 행위를 자랑하면 율법주의자이고 구원에 감사한 아들처럼 자기 행위를 자랑하지 않고 당연히 여기면 복음주의자입니다.
헌금할 때도 율법주의자가 거금을 헌금하면 교회는 어려워집니다. 교회에 대주주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큰 헌금을 하고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교인이 복된 교인이기에 하나님은 율법주의자의 큰 헌금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헌금하고 생색내면 더 큰일이기에 하나님은 소리 없이 조용히 드리는 사람을 기뻐합니다. 교회는 여러 명이 모였기에 한 사람이 자기를 드러내면 흔들리게 됩니다. 크게 헌신하고도 자랑이 없어야 복된 삶입니다.
율법적인 행위는 자기 행위를 자랑하지만 신앙적인 행위는 자기 행위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생명을 다 드려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사실 드리는 삶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부자는 물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나누는 사람입니다. 부부관계에서 주면 그 이상 얻지만 안 주면 그 이상 빼앗깁니다.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하나님이 “네 몸을 내게 드리라!”고 한 말씀은 “내 몸을 네게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람 관계에서도 “너 나 사랑해?”란 물음은 자세히 살펴보면 물음이 아니라 사랑의 고백입니다. 아빠가 어린 자녀에게 말합니다. “너 아빠 사랑하니?” 그것은 물음이 아니라 자녀를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연인들이 “당신 나 사랑해?”라고 묻는 것은 “난 당신 사랑해!”란 고백을 질문으로 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은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를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사랑관계에서는 질문이 고백이고 달라는 요구는 주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드리라.”고 하신 명령은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구원받는 자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몸과 삶을 하나님께 다 드리고도 더 얻게 되는 구원받는 자로서의 기쁨이 넘치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의무적인 어떤 행위가 있어야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될 것이라는 율법주의는 버려야 합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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