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이 한 해의 참회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 함은 문자 그대로
낡은 것을 다 버리고 새해와 함께
새것을 맞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적으로 우리의 옛 습관도
새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옛것을 버리는 결단을 해야 할 때입니다.
(엡4:22-24)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한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행동에 옮길 때입니다.
**
로마의 바티칸에 유명한 성 베드로 성당이 서 있습니다.
수 백년 전에 어떻게 이처럼
화려한 예술적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처참한 순교의 핏자욱이
널려있는 고난의 현장입니다.
카타쿠움을 안내하는 신부는 이런 소갯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방금 지상(地上)에서 가장 화려한 성전인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을 보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하(地下)의 가장 순결한 성전,
순교의 터전 위에 세워진 진정한 교회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발행에 반대하여
출발한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신앙은
저 카타쿠움의 지하교회처럼 초라한,
그러나 지극히 순결한 순교의 핏자국 위에 세워진 신앙입니다.
그 카타쿠움 어디에 화려한 스테인드 글래스(staind-glass)가 있고,
그 어두운 묘지 어느 곳에 대리석 강단이 있습니까?
그 지하교회의 어디에 수억원씩을 주고 산 총회장 자리가 있으며
자기 아들에게 물려줄 당회장 자리가 있습니까?
구약 레위기에 의하면,번제의 제물은 원칙적으로
소와 양과 비둘기이고 소제의 제물은
곡식의 고운 가루입니다(레위기 1:2,3,14, 2:1).
왜 사자나 코끼리 같이 강하고 늠름한 동물이 아니라
그 작은 비둘기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코끼리의 늠름한 위용도,
사자의 날쌘 용맹도 모두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소처럼 묵묵한 충성과 양처럼
온유한 순종을 원하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늘 높이 오르는 독수리의 비상이나
공작새의 화려한 자태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비둘기의 순결한
헌신만을 바라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공격적이고 자생력(自生力)이 강한 큰 동물들이 아니라,
모두 어린 양처럼 온유와 순종과 평화의 약한 동물들입니다.
두터운 껍질을 쓴 곡식 알맹이가 아니라,
그 껍질을 벗고 자기를 갈아서 해체(解體)시킨 고운 가루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제물입니다.
우리는 혹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코끼리보다
더 당당한 자기성취(自己成就)를,
사자보다 더 강한 힘을,
돼지보다 더한 탐욕의 풍요로움을 추구하지 않았습니까?
독수리의 발톱처럼 유능하고, 공작의 날개처럼 화려하며,
꾀꼬리의 목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로
우리의 두터운 껍질을 삼지는 않았습니까?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헛된 제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 함은 문자 그대로
낡은 것을 다 버리고 새해와 함께
새것을 맞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새해를 맞으면 계속해서
낡은 것을 사용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새 달력, 새 수첩만 바꿀 것이 아니라 낡은 것을 사용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우리의 옛 습관도
새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옛것을 버리는 결단을 해야 할 때입니다.
(엡4:22-24)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한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행동에 옮길 때입니다.
**
로마의 바티칸에 유명한 성 베드로 성당이 서 있습니다.
수 백년 전에 어떻게 이처럼
화려한 예술적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웅장한 성당입니다.
거기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로마시 외곽에
초대교회와 속사도시대(續司徒時代)의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쿠움(catacomb)이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예배장소는 베드로 성당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초라한, 그리고처참한 순교의 핏자욱이
널려있는 고난의 현장입니다.
카타쿠움을 안내하는 신부는 이런 소갯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방금 지상(地上)에서 가장 화려한 성전인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을 보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하(地下)의 가장 순결한 성전,
순교의 터전 위에 세워진 진정한 교회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순결한 교회를 바라신다는 말이겠지요.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발행에 반대하여
출발한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신앙은
저 카타쿠움의 지하교회처럼 초라한,
그러나 지극히 순결한 순교의 핏자국 위에 세워진 신앙입니다.
그 카타쿠움 어디에 화려한 스테인드 글래스(staind-glass)가 있고,
그 어두운 묘지 어느 곳에 대리석 강단이 있습니까?
그 지하교회의 어디에 수억원씩을 주고 산 총회장 자리가 있으며
자기 아들에게 물려줄 당회장 자리가 있습니까?
구약 레위기에 의하면,번제의 제물은 원칙적으로
소와 양과 비둘기이고 소제의 제물은
곡식의 고운 가루입니다(레위기 1:2,3,14, 2:1).
왜 사자나 코끼리 같이 강하고 늠름한 동물이 아니라
하필 그 순하디 순한 소와 양이겠습니까?
왜 독수리나 공작과 같은 용맹스럽고 화려한 새가 아니라 그 작은 비둘기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코끼리의 늠름한 위용도,
사자의 날쌘 용맹도 모두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소처럼 묵묵한 충성과 양처럼
온유한 순종을 원하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늘 높이 오르는 독수리의 비상이나
공작새의 화려한 자태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비둘기의 순결한
헌신만을 바라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공격적이고 자생력(自生力)이 강한 큰 동물들이 아니라,
모두 어린 양처럼 온유와 순종과 평화의 약한 동물들입니다.
두터운 껍질을 쓴 곡식 알맹이가 아니라,
그 껍질을 벗고 자기를 갈아서 해체(解體)시킨 고운 가루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제물입니다.
우리는 혹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코끼리보다
더 당당한 자기성취(自己成就)를,
사자보다 더 강한 힘을,
돼지보다 더한 탐욕의 풍요로움을 추구하지 않았습니까?
독수리의 발톱처럼 유능하고, 공작의 날개처럼 화려하며,
꾀꼬리의 목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로
우리의 두터운 껍질을 삼지는 않았습니까?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헛된 제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
성회(聖會)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이사야 1:11-13).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
이것이 어찌 저 옛날 이스라엘만의 일이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이 소유했던 모든 것,
곧 율법적 성취와 가문의 신분,
그리고 대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화려한 자격과
명예를 한낱 배설물처럼 내어버리고,
응당 자기가 받을 수 있는 대접마저도
"차라리 죽을지언정"(고린도전서 9:15)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 보수도 사례도 받지 않고
손수 천막을 짜면서 봉사했던 묵묵한 소였으며,
늘 자신을 쳐 복종시킨 온유한 양이었습니다.
호의호식과 안일함으로 영혼의 긴장을
이완(弛緩)시키지 않은 정결한 비둘기였고,
몸이 부서지도록 헌신한 고운 가루였습니다.
그는 입에 거짓과 궤사를 담지 않았으며,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애써 개척한 고린도교회에
아볼로가 뒤늦게 들어와 사역의 공간을 넓혀가자,
교인들을 두 편으로 갈라서 싸움판을 벌이거나
그와 자존심 경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도리어 아볼로를 고린도에 남겨둔 채
스스로가 떠나갔습니다(고린도전서 1:12-17,사도행전 19:1).
그는 작은 이해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원대한 영적 소명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사도 바울이야말로 어린 양 예수의
뒤를 따른 또 한 마리의 정결한 어린 양이었음을...
이 한 해 동안 우리들과 한국교회의 제물은 어떠했는지,
고요히 되돌아보아야 할 2012년의 결산기입니다.
이 한 해 동안의 우리의 제물이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갈라디아 1:10) 순결한
어린 양의 제물이었다고 결코 자신할 수 없습니다.
2013년 새 해에는 우리의 몸이 거룩한 산 제물이 되고,
우리의 전 인격과 전 존재를 순결한 어린 양의 제물로
드리기를 다짐하는 결단과 회복의
송구영신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 글은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이시며
사법연수원 수석교수이신 이우근님의 컬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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