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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파수

믿음의 주파수/ 기독교 영성에 관한 책 가운데 "눈을 뜨는 데는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보는 것은 찰라에 이루어진다." 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눈을 뜬다"고 하는 것은 물론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인생의 의미나 진리를 깨닫기까지 수십 년 또는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교회에 오고, 또 매일 매일 성경을 읽는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는 평생이 걸릴 수도 있지만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찰라에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보는 것이 찰라에 이루어지고, 깨닫는 것이 찰라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저절로 보이게 되고 저절로 깨닫게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눈이 다 볼 수 있고 모든 귀가 다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요즈음 여러분의 눈에 무엇이 잘 보이고 있으며, 여러분의 귀에는 무엇이 잘 들려오고 있습니까? 또한 지금 무엇을 보기를 원하고 무엇을 듣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어느 날 한 사람을 동시에 보게 되었을 때 안경가게 주인은 그가 쓴 안경이 눈에 띄게 보이고, 신발장수를 하는 사람은 그가 신은 신발이 눈에 띄게 되고, 의상 디자이너는 그가 입은 옷이 먼저 눈에 띄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은 자기의 관심에 따라서 자기의 "주파수"를 맞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주파수를 어디에 맞추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믿음의 주파수"를 맞추고 있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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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내과(老年內科) ★

★노년내과(老年內科) ★ 우리나라 종합병원에 노년내과(老年內科)가 있는 곳은? 국내에 일반내과는 무수히 많아도 노년내과는 1. 신촌 세브란스병원 2. 서울 아산병원 3. 분당 서울대병원 등 딱 세군데 뿐이다. 한데 노인들에 대한 일반내과의 진단과 노인내과의 진단기준이 전혀 다르다고 한다. 이를테면 고혈압에 있어 일반내과에서는 혈압의 정상기준을 120에서 80으로 보는 반면, 노인내과에서는 혈압이 170에서 100이 나와도 괜찮다는 거다. 또한 혈당기준도 일반내과와 노인내과가 전혀 다르다. 일반 내과에서는 공복혈당 수치가 100만 넘어도 (정상기준은 96이하) 당뇨전 단계니 하면서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노인들은 150만 넘지않게 관리하면 된다. 120 ~130은 정상이라는 거다. 즉, 칠십이 넘은 노인들에게 혈당이나 혈압의 엄격한 기준(基準)은 크게 잘못된 의료진단 이라는 거다. 칠십을 넘긴 노인들은 정기 건강검진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으며 가급적 긴박한 사항이 아니면 병원에 가지말라고 한다는 거다. 그래서인지 만성병 및 불치병 환자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벗삼아 자연식과 들과 산으로 움직이며 산세좋은 물과 공기를 마시며, 건강을 회복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듯 싶다. 그러니까, 칠십을 넘은 노인들은 살만큼 살았으니 아픈건 당연한 거고, 건강수치가 정상이 아닌게 오히려 정상이라는 거다. ● 이런 의사 정말 맘에 듭니다~ (QㆍA) Q : 의사 선생님, 심혈관 운동이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A : 의사 심장의 박동에만 좋아요,~ 그게 다예요. 고령엔 너무 운동에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모든 것이 결국 다 닳아요. 심장 박동을 가속화한다고 해서 더 오래 살 수 있다면 운동선수들이 오래 산다는 것과 ...

영혼의 잠언(11-20)

영혼의 잠언(11-20) 11.중심/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에는 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그 중심을 향해서 돕니다. 원자에도 중심핵이 있으며 그 중심을 향해서 돕니다. 태양계에도 중심이 있으며 지구는 태양을 향해서 돕니다. 그 중심은 만물의 주권자를 보여주며 그 중심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은 조화이며 질서이며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을 버리고 스스로 중심이 되며 스스로 멋대로 움직일 때 그것은 무질서이며 파괴이며 어두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는 것은 모든 아름다움의 시작이며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것은 모든 파괴와 멸망의 시작인 것입니다. 12. 사랑의 향취/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며 자신과 관계된 것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사랑이 아니며 하나의 집착과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통한 사랑에는 향취가 있으며 주님과 상관없는 사랑에는 사망의 악취가 있을 뿐입니다. 13.깨어남/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옆에 계시며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그분이 졸고 계시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자주 여호와여, 깨소서, 깨소서.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정 깨어나야 할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잠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옆에 계시며 그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끼게 될 것입니다. 14.우연/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 오게 된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우연한 사건 때문입니다. 우연히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고 우연히 우리는 어떤 것을 접합니다. 우연히 우리는 어떤 세계에 들어갑니다. 인생이란 우리가 원하고 계획하는 대로 가지 않고 우리의 생각을 벗어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진행되고 ...

□ 황톳길에서 만난 길손을 하늘나라로 떠나 보내며...

□ 황톳길에서 만난 길손을 하늘나라로 떠나 보내며... 어느 날, 어느 노년 신사와 계족산 (대전광역시 대덕구와 동구에 걸쳐 있는 산높이는 429m) 황톳길을 함께 걷게 되었다. 그는 75세 된 말기 암 환자였다. 부인과는 작년에 사별을 했고, 혼자 사는데 자식들은 1남 1녀로 모두 서울에 산다고 했다. 여기 황톳길 오기 전에 자식들과 상의 없이 APT 등 모든 재산을 정리했고, 여행용 가방에 옷과 생활 용품만 가지고 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APT에 있던 가재도구는 모두 중고업체에 넘겼다고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인근에 있는 보리밥집에 맡겨 놓은 여행용 가방과 통장, 체크카드 뿐이라고 했다. 여기서 내려가면 미리 예약한 요양원에 입실하면 된다고 했다. 계족산 부근이 고향이고 해서 인근 요양원을 택했다고 한다. 함께내려오면서 길손이 되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 젊은 시절에 서울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행정고시 합격 후 서울시에 첫 공직생활을 한 뒤 총무처, 청와대 등에서 근무했다고 했다. 앞뒤 안 보고 열심히 일해서 차관보까지 승진해 잘 지내다가 퇴직무렵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 생활을 했다고 한다. 부인이 병간호 몇 년간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고 했다. 부인이 죽고 나서 혼자 병원 통원 치료와 입원을 몇 년간 반복했다고 한다. 병원에 입원하면 자식만 왔다가고, 며느리는 잘 오지 않았다고 했다. 딸은 가끔 병원에 오면 시어머니가 아파서 병간호에 너무 힘들다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병원서 퇴원 후 잠시 딸 집에 들렸더니 손주들이 할아버지한테서 냄새 난다고 잘 오질 않았다고 했다. 이러한 분위기이다 보니 조금 앉아 있다가 약속 있어 간다고 하고 황급히 나왔다고 한다. 인근에 살고 있는 아들 집에도 들려서 초인종을 누르니 며느리가 '아이고, 아버님! 연락도 안 하시고 이렇게 불쑥 찾아오시면 어떡하냐'며 문전 박대를 받았단다. 아들에게는 집에 잠시 들렸다고만 했다. 아들은 퇴근길에...

*성가곡 시편23편*

***성가곡 시편23편***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인민군에 쫓겨 정부가 진해로 옮겨 갔습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한국 정부를 일본으로 옮기라고 권유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진해 바다에 빠져 죽을지 언정 이 땅을 떠나지 않겠노라"하며 진해를 지켰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민군들이 쏘는 포 소리를 지척에서 들으며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정부가 진해로 옮겨간 후 첫 예배를 드리던 때였습니다. 연세대 교수였던 나운영 교수가 성가대 지휘자 였습니다. 나운영 교수는 피난 정부에서 드리는 첫 예배에 찬양을 무슨 곡으로 선택할까를 고심하다 시편 23편을 친히 작곡하여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밤을 새우고 작곡을 하여 첫 예배 찬양으로 불렀습니다. 찬양대가 찬양을 드리기 전에 나운영 지휘자는 신도들 앞에 나가 시편 23편을 작곡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는 눈물을 흘리며성가대를 지휘하였습니다. 찬양을 들으며 대통령 부부도 울고, 성가대 대원들도 울고 예배에 참여하였던 신도들도 모두가 울었습니다. 그야말로 눈물의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찬양대의 성가가 끝난 후 여호와께서 이 나라를 공산화의 위협에서 구하여 주실 것을 울며 기도 드렸습니다 그런 눈물의 기도가 응답되어 오늘의 한국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선배들의 눈물의 기도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 중에 대표적인 시가 23편입니다. 이 시는 다윗 왕이 재야 시절 사울 왕에게 쫓기며 각박한 세월을 보내던 시절에 지은 시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되는 시편23편은 문학적으로도 완벽한 내용이려니와 내용에 담긴 영적 깊이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시편 23편을 읊조리며 이 겨레의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이 나라를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굳게 세워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복된하루 보내시기를 ...

착한 남자, 착한 여자/

착한 남자, 착한 여자/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악한 사람들이 복을 누리는 것 같은 모습이 분명히 있습니다.그래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한탄하고,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있는 게 맞냐고 절규합니다. 그래 처음에는 착하게 살다가도, 마침내 착하게 사는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착하게 산 결과가 손해와 고통뿐이라면, 착하게 사는 것이 무슨 가치를 지니겠느냐고 생각하게 됩니다.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의 옆집에는 한 쪽 팔이 없는 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소녀가 학교에 가는 시간이면,그 아이는 언제나 옥상에 올라가 소녀의 집 앞마당을 내려다보거나,등교길에 재잘대는 아이들을 구경하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말이라도 걸라치면, 그 앤 금방 모습을 감췄습니다. 어느 날 옥상 위의 아이를 발견한 소녀가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저 앤 팔이 없대요. 그래서 학교도 못 다니 고 집에만 있는 거래요.” “저런, 딱하구나.” 그 날 저녁이었습니다. 아빠가 갑자기 창고에 버려 둔 낡은 책상을 들어 내 부러진 다리를 붙이고, 마당 한가운데에 전깃줄을 연결해 전등까지 켜는 것이었습니다. “자, 오늘부터 여기서 공부하자. 이제 아빠가 우리 공주님 과외선생님이다.” 소녀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아빠가 만든 뜨락 교실의 학생이 되었습니다. “자, 오늘 학교에서 배운내용을 큰소리로 읽어 보거라.” 그 날부터 소녀는 눈이 오거나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한 시간씩 교과서를 읽고 동화책도 읽었습니다. 아빠가 그 별난 야간수업을 그만 둔 건,옆집 아이가 이사를 가던 날이었습니다. 퇴근길에 이삿짐 트럭을 본 아빠가 물었습니다. “옆집 아이 이사 가니?” “네” “그래. 다른 데 가서도 공부를 계속 하면 좋을 텐데” 소녀는 아빠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옆집 아이의 이사에 왜 그리도깊은 관심을 보이는지 궁금했지만, 아빠는 끝내 말을 아끼셨습니다.소녀가 아빠의 그 깊은 뜻을 알게 된 건, 세월이 한참 흐른 뒤였습니...

🏥 치 매

🏥 치 매 / 이 이야기는 서울 이병소 박사께서 보내오신 글입니다. 원래의 이야기는 강원도 철원 출신 몽골 사업가 안홍조 씨의 글입니다. 는 자신은 물론 가족과 이웃 지인들 모두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무서운 질병으로 치료법이 없다는게 현재까지의 정설입니다. 1956년생(70세)인 제가 고향 철원에서 운영하던 사업체(주. 삼흥관광)를 동생에게 물려준 후, 이역만리 몽골로 들어와 외국인 최초로 토지(2,311평방미터)를 매입 후, 건물을 축조하고, "동대문"이라는 상호로 몽골 최초 한국식 대형 사우나를 설립, 운영하였더니 순풍에 돛단듯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한 얼마 후, 의 조짐을 느껴 경희의료원의 진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담당의는 박기정 교수님! 교수님께서 문진을 마치신 후, 말씀하신 한마디, "치매(痴昧)!입니다." 천둥소리처럼 들린 이 한마디가 70평생을 살아온 저의 인생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어서 하시는 말씀, "음식을 싱겁게 드십시요" 집에 돌아온 후, 모든 음식에서 소금을 배제한, 저염식단으로 바꿨지만 치매는 야속하게도 점점 더 심해져 갔고, 사업은 물론 일상생활조차도 어려워 졌습니다. 거래 상대방의 이름과 상호, 현금 입, 출금 및 거래내역조차 기억하지 못하면서, 길을 나서면 "내가 어디를 가려고 했지?" 목적지에 도착하면, "내가 왜 여기에 왔지? 차를 타고서도, "어디가는 차지?" 내가 뭘 사긴 샀는데, 물건은 어디 있지? 반복되는 건망증과 소지품의 유실(流失)로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졌고, 가족과의 마찰도 극도로 심해졌습니다. 사소한 이유로도 아내를 책망하고 핍박했습니다. 여러 병원을 찾아 꾸준히 처방 약을 복용했지만, 차도는 커녕, 내 자신이 나를 생각해도 한심할 정도로 상태는 악화되었고, 모든 일에서 자신감을 상실했습니다. 몽골로 돌아 온 어느 여름날, 동부 몽골...